그러니까 당신이 복도에 서 있었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다음 건물이 무너져 내렸던가요?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혼탁하기만 합니다.
그저, 새빨갛게 변한 세상. 그 붉은 핏물 너머 당신을 간절히 끌어안던 발렌틴의 체온만이 여즉 선연합니다.
당신이 생각에 잠긴 사이 머지않아 발렌틴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오래 기다렸어? 비스켓이 좀 남았길래 가져왔는데.
테이블 위에 접시를 놓는 소리가 들립니다.
디안 밀리테:별로 안 기다렸어. 떠날 거라고 해서 정리를 좀 했고...
비스켓? 잘 됐다. 하나만 먹을게. (손으로 접시 위 비스켓 찾아 집었다...)
먹어보니 버석한 식감에 비해 의외로 맛은 나쁘지 않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그럼 다행이고... (하나 집어 먹어본다.) 맛이 거지 같아. (찌풀!) 이걸 먹으라고 만든 거야, 버리라고 만든 거야?
식자재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점에서 무언갈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것이지요.
발렌틴은 투덜거렸지만요.
디안 밀리테:(옅은 웃음...) 이런 거라도 남아있는 게 어디야. 내가 맛있는 거라도 해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눈만 괜찮았다면...)
플로렌틴 발렌틴:사알짝... 그립긴 하지만. (음, 아니야.) 됐어. 어차피 식자재도 없는걸. (으쓱...) 아, 이 근방의 지도를 발견했어. 낡고 훼손되어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병원과 방송국이 있고, 같은 선상에 대형마트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더라.
어디 먼저 갈까?
디안 밀리테:방송국... (아까 들렸던 전파의 출처인가.) 그러면 병원부터 가볼까. 뭔가 유용한 약품들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플로렌틴 발렌틴:좋아. 부디 누가 먼저 다녀가지 않았으면 좋겠네. 따로 챙길 물건 있어?
디안 밀리테:음... 아니. 없는 것 같아. (하고 네 손 얽혀 잡았다.) 잊지 말고 나 챙겨가.
발렌틴은 소리 내어 웃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나아가는 목적을 두고 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이내 준비를 마치고 거처를 벗어나려는 찰나 당신의 목에 두툼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감깁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선물! 요즘 날이 더 추워지더라. 너 원래 쓰던 건 너무 오래됐잖아.
뺨에 닿는 촉감으로 보면 복슬거리는 털실로 짜인 목도리입니다.
무슨 색인지는 알 방도가 없네요. 감촉이 부드럽고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원래 사용하던 목도리는 이리저리 낡고 더러워진 이후였지요. 당신에게는 그 얼룩이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디안 밀리테:원래 쓰던 것도 괜찮았는데... (목도리 만지작 거리다가 웃고는) 고마워. 훨씬... 따뜻하다. 무슨 색이야?
플로렌틴 발렌틴:베이지색 바탕에 연한 하늘색 털실. 하늘색이 아니라 노란색이면 더 좋았겠지만... 이걸로 만족하고 있어. (뿌듯...)
디안 밀리테:(베이지색 바탕에 연한 하늘색... 보지는 못하지만 대신 모양 상상하고) ...난 붉은색이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는데. (농담 던지고) 고마워, 정말로... 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게 없는데.
플로렌틴 발렌틴:존재 자체만으로... (농에 웃고 말 흐린다. 뒷내용은 알겠지. 대신 한 번 활짝 웃는다. 마주보지는 못할지라도.) 이만 가자!
잡다한 의학 용어가 가득 섞여 있는 대화입니다. 이후 잡음으로 인해 더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한때 어딘가의 저명한 박사들이 한창 이 역병에 대해 연구하고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소리 같습니다.
감염원은 특이한 구조의 기생충이라고 했나요?
✎:이상한 일입니다.
왜 여태 그 어떠한 TV나 기타 뉴스에서조차 관련된 소식은 하나도 들어볼 수 없었던 걸까요?
분명 그 누구도 질병의 원인이나 치료 방법 따위는 밝혀내지 못했다고 했었는데요.
언론이 마비된 이후 최근에 녹음된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지금도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치료제를 개발하려 힘쓰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디안 밀리테:누군가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어쩌면, 이전의 세상으로...) ...좋은 소식이네. 로렌한테 전해줘야겠어.
(더 볼 건 없겠지... 슬슬 자리를 뜬다.)
...
그 순간,
이윽고 복도에서 발렌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을 찾고 있는 것 같네요.
플로렌틴 발렌틴:딘, 거기 있어?
디안 밀리테:아, 로렌. 응, 나 여기 있어! (외치며 급하게 움직임...)
당신이 그쪽을 향해 몸을 틀려는 순간 툭, 저도 모르게 건드린 높다란 서류 뭉치가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뒤늦게 팔랑, 팔랑, 천천히 떨어지는 종이들이 당신의 발치에 닿습니다.
만져보면 무언가의 사진 같습니다.
디안 밀리테:응? (사진인가... 일단 챙긴다.)
당신이 쏟아진 서류에 반쯤 덮여 있는 찰나, 문 바깥에서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립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여기 있었네. 여긴 기록실이나 자료실 같아 보이는데… 그 서류는 다 뭐야?
발렌틴이 보기에는 흡사 난장판이 따로 없었을지 모릅니다.
실상 당신이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바닥에는 잡다한 서류들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던 것 같았지만요.
디안 밀리테:그을... 쎄. 나도 읽어보진 못해서... 아, 근데 의미 있는 정보는 찾았어. (만년필 보여주며) 여기 녹음 되어있던 건데, 질병의 원인을 찾았다는 내용이야. 기생충... 이랬던가. 치료제가 개발될 수 있을지도 몰라. (옅게 웃었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도 예전처럼 되돌아갈 수 있다는 소리야.
그리고... 이 사진. 무슨 사진이야? (들고 있던 사진 내밀었다.)
플로렌틴 발렌틴:(네 말에 걸음을 잠시 멈춘다.) 아, 치료제... (목소리가 잠시간 떨리는 듯하더니 이내 밝은 조로 이어 말했다.) 잘 됐네. 희망을 가질 수 있겠다... (마저 걸어간다. 사진을 보고 또 한동안 말이 없다.) 이 사진 어디서 났어?
디안 밀리테:응.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으니... (그리고 네 침묵에 의아해 하다가) 아무 종이나 집었는데, 마침 사진이여서. 기록실에 있는 사진이면 뭔가 정보가 있지 않으려나 해서 보여준 건데... 왜?
플로렌틴 발렌틴:아, 아니야. 그냥 여기는 서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진도 있어서 좀 놀랐네. 그냥 건물 같아. 쉘터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네. (사진은 네 손에서 가져간다.)
디안 밀리테:건물? 무슨 건물이길래... 아는 곳이야? 거기 가면 생존자들이 있다든가...
플로렌틴 발렌틴:모르는 곳이야. 아무래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
발렌틴은 쉘터나 생존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본다며 두툼한 서류 뭉치를 읽기 시작합니다.
✎:방금 당신이 쏟아낸 것만 해도 분량이 상당해 보였는데, 몇 분 내로 조사가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원한다면 발렌틴의 옆에서 그가 보는 자료의 내용을 읊어달라 할 수도 있겠죠. 그게 아니라면 미처 살펴보지 못한 곳을 마저 살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조사에 지쳤다면 발렌틴이 자료를 읽는 동안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밀리테?
디안 밀리테:(네가 곁에 있는데 굳이 두고 어디 가긴 싫다... 옆에 쭈그려 앉았고) 무슨 내용이야? 읽고 있는 서류들.
플로렌틴 발렌틴:(...) 그,러니까... (종이 팔락 넘긴다. 넘기는 속도가 느렸다.)
팔락, 하고 서류가 바닥에 떨어집니다. 발렌틴이 떨어뜨린 모양이에요.
디안 밀리테:(떨어진 종이 줍고...) ...왜? 말하기 곤란해?
...
플로렌틴 발렌틴:내가 네게 말하기 곤란한 게 어디에 있겠어. 내용이 너무 많아서 잠시 읽고 있었어. (...) 대강, 쉘터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아. 다행이야. 비행기 타고 날아갈 필요까진 없겠다... (가만 기운 없는 농담 던졌으나 그 기색은 아주 미세하여, 평소와 유사했다.)
디안 밀리테:(심리학 판정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디안 밀리테: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플로렌틴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디안이라면,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떨고 있는 것도 같네요.
디안 밀리테:...로렌? 왜 그래. (어깨 짚었다. 옅은 떨림이 느껴졌던가.) 쉘터에 가서 생존자들을 만나는 게 목표 아녔어? 그게 살아남는데 더 유리하니까...
플로렌틴 발렌틴:물론 맞지. 음, 이게 얼마만의 단서인지. 다행인 마음에 손이 다 떨리네... (얕게 웃음소리 내어 웃는다.) 내용이 더 많은 것 같아. 찬찬히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저기서 좀 쉬고 있을래? 다 읽으면 출발하자.
디안 밀리테:(뭘... 숨기고 있는 거지.) ...응, 그러면 난 잠깐 근처 둘러보다 올게. 유용한 정보가 더 있을지도 모르고...
발렌틴은 그냥 있으라고 말하려다 멈춥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좋아. 효율적인 편이 나으니까...
발렌틴은 서류를 보는 것에 이상하리만치 열중하는 듯 팔랑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기다리는 와중 주변을 마저 둘러보고자 한다면 어디선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작은 신호음을 눈치챕니다.
디안 밀리테:로, 로렌, 나, 나... (손에 잡히는 뭐든 일단 잡고 보았다. 아마 네 팔인 것 같았고.) 나... 나는, 괜찮아. 응, 괜찮아... 그 날이 아니야. 살아있어. (중얼거렸다.) ...로렌, 너는? 어디 안 다쳤어?
플로렌틴 발렌틴:(다시금 세게 껴안는다. 고개를 푹 파묻고 웅얼거렸다.) 멀쩡해. 나는 네가... (...) 네가 사라지는 줄 알았어. 또. 내가 어떻게 널 내 곁에 뒀는데... (다시 잃을 수는 없어, 딘. 힘 푼다.) 정말 다행이야. 조심하자, 우리. (부디.)
디안 밀리테:('내가 어떻게 널 내 곁에 뒀는데'? 이상한 문장이라 생각했다. 우린 항상 같이 있었고, 그걸 막는 사람들은 없었는데.) ...응, 먼저 사라지지 않아. 변치 않을 맹세를 했잖아, 우리... (더듬거려 네 손을 잡았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너가 다쳐버리기라도 하면, 난... 지금 무엇도 해줄 수 없는데.)
플로렌틴 발렌틴:(시야를 내리고 입술을 깨문다. 보이지 않겠지만.) 나를 믿어. 완벽하게 괜찮으니까. 어서 여기를 나가자. (맹세를 했다지만 나는 불안해, 딘. 늘 그래왔듯 불안해. 세상은 맹세를 지켜주지 않으니까.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것도 있는 거야. 나는 이제 그걸 알아. 숨을 고르고 마른세수했다.) 그만 나가자. 여기에 더 있다간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곧바로 일어나 네 손 이끌지만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평소보다 더한 불안이 명백해서.)
디안 밀리테:(내가 변치 않을 맹세를 믿게 된 건 오롯이 네 말 덕분인데도. 불안하다는 네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눈 감는 동안, 네가 본 세상은 대체 어떤 것이길래... 네 얼굴 하나 보고 싶었다. 허락되진 않겠지만.) ...그래. 가자. (잘게 떨리는 네 손 힘주어 잡았다. 네 거대한 불안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그게 너무 범람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당신과 발렌틴은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건물에서 벗어납니다.
어쩐지 발렌틴이 한쪽 다리를 저는 것도 같았는데, 착각이었을까요?
당신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당신은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인기척을 느낍니다.
엘렌 제이:갑자기 난데없이 뭐가 무너지나 해서 와봤더니…
상당히 걸걸한 투의, 중년 즈음 되어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입니다. 당신이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듯 낯선 음성입니다.
생존자입니다. 목소리만 들어선 확신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 끔찍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의 음성은 아닙니다.
여성은 각 잡힌 발소리와 함께 가까이 다가오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우뚝 멈추어 섭니다.
엘렌 제이:대체 너희들 안에서 뭘 한 거야? 그리고 그것보다 너 그 붕대…
플로렌틴 발렌틴:...사고가 있었어요. 감염된 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이 뭐라 답하기 전 발렌틴이 당신의 한쪽 허리를 감싸 안으며 대신 답합니다.
아직 생존자가 꽤 많았을 시절 얼굴의 붕대 탓에 종종 감염자로 오해를 사곤 했었죠.
지금이야 감염자와의 거리가 아무 상관 없다는 게 밝혀진 이후지만, 아직까지 역병 환자라 하면 기피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다행히도 눈앞의 인물은 그런 부류는 아닌 것 같네요.
엘렌 제이:(...) 이쪽은 엘렌 제이. 편하게 엘렌이라 불러. 그나저나 이 근처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조만간 쉘터를 정리하고 미리 보아둔 장소로 이주하려던 찰나 당신과 발렌틴을 마주치게 된 겁니다.
앤 밀러:...그래서, 그때 엘렌이 죽을 뻔한 나를 구해준 거예요. 그 뒤로 이곳에 합류해 있죠.
지금 당신의 옆에 앉아 푸근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사람은 앤 밀러입니다.
그녀는 재작년 즈음 식량을 노리고 습격한 강도에게 남편을 잃고, 이후 엘렌에게 발견되어 쉘터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함께 들어온 스물한 살의 딸은 몸이 좋지 않아 방에서 잘 나오지 못한다고 하네요.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외부인일 뿐인 당신에게 친절하게 이곳의 사정을 말해준 사람 또한 그녀입니다.
디안 밀리테:그런 일이... 힘드셨겠어요. (고개 주억거리다가) ...근데 이렇게 다 말해주셔도 되나요? 저희는 그저 잠시 머물다 갈 외부인일 뿐인데...
앤 밀러:나는 서로 어려울 때 더욱 돕고 살아야 한다고 봐요. 몇 년 만에 새로운 사람이 오니 케이도 좋아하는 것 같고요. 또, 혼자가 될 때 사람은 쉽게 외로워지잖아요. 밀리테와 발렌틴만 괜찮다면 여기 계속 머물지 않을래요? 사정을 대강 엘렌에게 전해들었거든요.
디안 밀리테:혼자면... 그렇죠. 외로운 건 막을 수 없더라고요. 혼자 서 있을 때. (잠시 놀란 낯.) 계속...요? 그런... 그럴 수만 있으면 엄청 좋죠. 나중에 로렌에게 물어볼게요. 제일 중요한 건 로렌 의견이라... (슬 웃고.) 그나저나... 치료제 개발 소식 같은 건, 들어보셨나요?
앤 밀러:(잠시 안쓰럽단 듯 바라본다. 어조에서도 묻어났다. 눈 부상에 대한 건 아닌 듯한데... 이상하게.) 치료제요? (그러고 보니...) 잘 모르겠네요. 언론에서도 자세히는 들은 적 없어요. 무슨 인체실험으로, 뭘 한다던데. 그런 건 질색이에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니. 정말 기이하지 않나요?
디안 밀리테:(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잠시간의 침묵이라고만 느꼈을 뿐...) 대부분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니까요. 저는 남한테 희생을 강요하진 못하지만, 강요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해요. (그 강요의 대상이 저 자신이 된다고 해도.) 그렇게라도 살고 싶은 게 인간임을 알고 있으니까... (간극. 곧 쾌활한 투로.) 이 쉘터를 떠나 이동하려던 곳은 어디었어요?
앤 밀러:(신중하게 고개 끄덕인다.) 근방에서 조달할 수 있는 생필품이나 음식은 거의 바닥났다 하더라고요. 이주 내로 남쪽으로 떠날 생각이에요. 같이 갔으면 하네요. 두 사람만 좋다면 우리는 언제나 환영이에요.
한창 앤과 대화를 하던 와중 얼핏 발렌틴 쪽에 귀를 기울이면 아직도 케이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발렌틴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쪽에 신경 쓰고 있는 당신을 눈치챈 것인지, 앤이 인자한 음성으로 부드럽게 말을 겁니다.
앤 밀러:그러고 보니 아직 함께 온 일행과는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네요.
그러니까 두 사람은, 연인 사이인가요?
앤은 이후 고개를 절레 저으며 미안하다는 듯 말을 덧붙입니다.
앤 밀러: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주책이람. 미안해요, 소중히 여기는 게 눈에 보여서 그만.
이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거죠.
어쩐지 그 마지막 말의 울림이 묘하게 안타깝게 들립니다.
그러고 보니 앤은 불과 몇 년 전 강도에게 남편을 잃었다고 말했었지요. 어쩌면 그를 추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디안 밀리테:괜찮아요. 연인... 이라고 불러도 되려나요. (막상 고백 비스무리한 건 엉망진창인 약혼 반지 건네주기 밖에 없었는데.) 소중한 사람이죠, 무엇보다도. (질문 공세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 돌렸다가) 밀러 씨는 남편 분을 잃었다고 하셨죠. 유감이에요, 정말...
찰나의 침묵 끝에 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집니다. 다감하게 웃어보이네요.
앤 밀러:이만 저녁 식사라도 도우러 가야겠네요.
오랜 시간 걷느라 몸도 불편하고 피곤할 텐데, 편히 쉬고 있어요. 케이, 너도 손님 그만 괴롭히고.
앤이 다정하게 당신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자리를 벗어납니다.
그런 당신의 옆에 비로소 케이에게서 해방된 발렌틴이 피곤한 듯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습니다.
그가 앉은 쪽 어깨에 툭, 익숙한 무게감이 자리합니다.
플로렌틴 발렌틴:피곤하네… 날 버려두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했어?
디안 밀리테:별 얘기는 아녔어. 케이랑 노는 건 어땠어? (작게 웃으며 물었다.)
플로렌틴 발렌틴:뭐어, 애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 생기 넘치더라고. 이 쉘터가... 좀 투박하지만 다정하고. 다들 좋은 사람 같아.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거리가 가까워지자 얼핏 희미한 혈향을 맡습니다.
디안 밀리테:아, 마침 밀러 씨가 계속 머무는 건 어떻냐고 물어보시더라고. 너만 좋다면 나는 당연히 좋다고 말했는데... (그 순간, 희미한 혈향 맡고) 잠깐, 로렌. 피 냄새... 어디 다쳤어?
플로렌틴 발렌틴:난 네가 좋으면 좋아. (여기 정착하는 게 좋겠다. 기대어 나른한 투로 말하다 이어 자연스레 고개 들고 떨어진다.) 다치진 않았는데. 왜, 피 냄새 나? (흠...) 아까 조사하면서 시체를 봤는데, 좀 뒤지느라 스몄나 보네. 신경쓰지 마. 넌 날 믿잖아. 그렇지?
디안 밀리테:(심리학!!!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디안 밀리테: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플로렌틴의 말에는 그닥 기시감이 없습니다.
디안 밀리테:응, 아까는 몰랐는데 가까이 있으니까 느껴져서... 마트에서 다친 줄 알았잖아. (품 안에 널 안았다.) 아프지 마, 다치지 말고. 전 같았으면 널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너무 무력해서. 고작 시력 하나 없어진 것 만으로 할 수 없어진 게 너무 많아서.) ...널 믿어. 언제나.
플로렌틴 발렌틴:응, 사랑해, 딘.
그 순간, 어디선가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투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 이후 벌컥, 어딘가의 문이 열리고, 그와 동시에 후욱 바깥의 찬 공기가 실내에 가득 파고듭니다.
브랜 가이에스:어디 보자,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고?
때론 음성만으로도 상대의 인상을 가늠할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보지 않아도 강렬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거구의 체격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그는 큰 보폭으로 당신에게 다가오며 다소 성급한 인사를 건넵니다.
브랜 가이에스: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낯선 사람이군 그래! 브랜 가이에스라고 하네.
플로렌틴 발렌틴:이쪽은 플로렌틴 발렌틴이에요.
디안 밀리테:안녕하세요. 디안 밀리테라 합니다.
겨울날의 찬 기운을 담뿍 머금은 인물은 당장이라도 호탕하게 당신과 격한 포옹이라도 나눌 것처럼 다가왔으나…
어째선지 그 이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뚝 멈춘 발걸음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끊겨 있습니다.
이윽고 당신의 지척에서 멈춰있던 숨소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립니다.
브랜 가이에스:...당신 뭐야.
당신… 너, 네가 뭔데 그걸 하고 있어.
마치 단단히 이를 악문 듯한 낮은 목소리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그의 주변을 감싼 공기가 삽시간에 위협적으로 바뀝니다.
퍽, 거세게 당신의 멱살을 잡아챈 손아귀가 억세게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을 표출합니다.
주변에서 발렌틴이나 다른 사람들이 급하게 제지하는 소리가 들려오나, 그의 신경은 오로지 당신에게만 집중된 듯합니다.
갑갑하게 당신의 숨통을 끌어당긴 그의 손길이 당신의 목을 감싼 것을 움켜쥡니다.
브랜 가이에스:이거… 어디서 났어. 이 목도리.
내가 린에게 직접 선물한 건데. 너.. 아니, 당신. 린을 만난 건가?
그의 우악스러운 손을 붙잡으면 왼손 약지에 걸린 두툼한 반지가 느껴집니다.
손끝에 눌리는 촉감으로 보아 결혼반지로 보입니다. 린이라니, 결혼한 배우자라도 찾고 있는 건가요?
마침 딸을 간호하며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차를 우리고 있었으니 수프와 함께 마시는 것도 좋겠다 권하면서요.
발렌틴을 위해 선뜻 나서주는 모양새를 보아 앤은 아픈 사람을 간병하는 것에 익숙해 보입니다.
앤 밀러:걱정 말아요. 금방 나아질 거예요.
디안 밀리테:고마워요... 그러길 바라지만, 원체 몸이 약했어서 걱정이네요. 밀러 씨가 도와주셔서 다행이에요...
수프와 차가 준비되려면 삼십 분은 걸릴 것 같네요. 그 시간 동안 근처 지형을 익히나요, 돌아가나요?
디안 밀리테:(로렌이 걱정되긴 하지만... 일단 이곳에서도 머물러야하니. 돌아 다녀본다.)
.
.
.
그러니까, 지금 어디쯤 온 거죠?
아직 지형이 익숙하지 않은 당신은 머지않아 길을 헤매게 됩니다.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코끝에 은은하게 알코올 향이 스쳐 지나갑니다.
당신이 복도의 코너를 도는 순간, 툭, 비틀거리는 누군가와 몸이 살짝 부딪힙니다.
브랜 가이에스:...아, 너는.
그… 잠깐 시간 괜찮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가까이에 선 브랜의 몸에서 독한 알코올 냄새가 풍깁니다.
밤새 술을 마시며 울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목소리는 어제와 달리 지나치게 잠겨 있습니다.
당신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눈치네요. 어떻게 할까요?
디안 밀리테:(술 냄새...) ...네, 괜찮아요. 어제와 같은 무례만 아니라면.
브랜은 머쓱한 태도로 적당히 앉을 수 있는 장소로 밀리테를 데려갑니다.
브랜 가이에스:시간 내줘서 고맙군. 사실 별건 아니고, 어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서.
디안 밀리테:음... 그건 그렇게 오해했을 수도 있으니까, 괜찮아요. 저도 가이에스 씨 입장이었으면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브랜 가이에스:변명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린을 보지 못한지 정말 오래됐어. 또, 세상이 이렇게 되고 워낙 흉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니까. (술병을 기울여 목을 축인다) 오해해서 미안하군.
디안 밀리테:사과하셨으니 괜찮아요.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면 그럴 수 있죠... 많이 아끼셨나봐요, 린 씨. 어쩌다 헤어지게 된 거예요? (묻는 게 무례가 아니라면.)
브랜 가이에스:(고맙단 듯 미소짓는다. 보이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사고가 있었어. 대피하다가 인파가 너무 몰려서 그만. (목소리에 눅눅한 물기가 번진다) 그때 그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디안 밀리테:아. 유감이네요... 그 일은. (짧게 침묵.) ...그, 군인 분의 남동생이신 건가요? (이름이 엘렌... 씨였나.)
(누가 ...머릿속으로 사고에 대해 물어보라 한 기분!!) 그리고 혹시, 그 사고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브랜 가이에스:(작게 웃는다.) 그건 아니지만... 소중한 사람들이지, 다들. 무슨 폭발 사고였겠지 아마. 무슨 제약 회사 소속 연구실 같았어.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군그래. 멀쩡하던 건물이 무너져내렸으니 우린 전쟁이라도 시작되는 줄 알았어. 린을 놓친 자리에 뒤늦게 되돌아갔지만,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린은 돌아오지 않았지. …어쩌면 그때부터 그녀가 죽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야 했는지 몰라.
디안 밀리테:죄송해요. 이름은 디안 밀리테고, 어제 쯤 새로 들어왔어요. (쫓겨나기 전에 우다다 말하기...) 도움, 도움을 주고 싶어서... 약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밀러 씨한테 부탁해서.
티아나 밀러:... (꾸욱, 이불 쥔다.) 됐어요. 어차피 쓸모 없는 낭비니까요. 울고 있던 건...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저,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에 의미가 있는지, 저는 모르겠거든요. 어차피 나을 수 없는 병이잖아요, 이거.
.........저는 티아나.. 티아나 밀러에요. 혹시 우리 엄마, 앤 밀러를 만났나요?
디안 밀리테:그래도, 살아있다 보면 언젠가는... (말 멈췄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영양가 있는 말은 아니겠다 싶어서.) 아, 밀러 씨의 딸... 네. 덕분에 금방 여기 적응할 수 있었죠. 고마우신 분이에요.
티아나 밀러:...당신은 괜찮은 건가요? 그 눈….
디안 밀리테:...사고로 시력을 잃었어요. 뭐든 익숙해지면 괜찮아지죠. (거짓말이다.)
티아나 밀러:아, 감염된 상처가 아니군요. (흠칫 놀라며) ...미안해요. 나는 당연히 당신도 나와 같은 줄 알고… 비슷한 냄새가 났거든요.
디안 밀리테:냄새? (고개 기울였다.) ...무슨 말인진 잘 모르겠지만. 감염자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받아주지도 않았겠죠.
티아나 밀러:그래도 받아줬을 거예요. 좋은 사람들이고, 전염되는 것도 아니니까... (이미 감염된 저처럼요. 눈 찌푸린다.) 비슷한 냄새... 이런 말 하면 실례겠지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버무린다.)
디안 밀리테:좋은 사람들인 건 알지만. (과연 외부인들한테까지 상냥했을까?) ...저한테 감염된 사람의 냄새가 나나요?
티아나 밀러:...그게... 무언가 썩는 냄새가... 미안해요. 이, 이만 혼자 있고 싶어요. 나가주세요.
머지않아 당신은 명백한 축객령과 함께 밖으로 쫓겨납니다.
절뚝거리는 걸음 소리와 함께 달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네요.
그녀는 사람과의 대화를 기피하는 듯싶습니다. 당신이 방에 들어간 순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었지요.
✎:저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무력한 결말을 맞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치료제가 존재하지 않는 끔찍한 질병. 산채로 장기와 피부가 갉아 먹히는 통증이라니,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숨을 구석 하나 없이 병마의 손길이 닿았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언젠가 당신이나 발렌틴도 감염이 되는 게 아닐까요? 문득 불안한 생각이 찾아듭니다.
이 광활한 땅에서 홀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 있나요, 밀리테?
디안 밀리테:(너 없는 삶도 생이라 이어갈 수는 있겠지만, 이상하게 예전같이 무던해지지가 않는다. 정말 이상하지, 내 삶은 언제나 연명과 같았고 병처럼 퍼진 불행이 인생을 바닥까지 쳐박아도 삶을 구걸했는데. 너 없는 삶이 두려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너 없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로...)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불쾌하게 끈적이던 것이야 발렌틴이 실수로 바닥에 쏟아버린 찻물이겠지요. 머지않아 깔끔하게 치워버리면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겁니다.
침대 밑에 무언가 있던가요? 분명 굴러다니던 잡동사니나, 죽은 쥐의 사체 따위였을 겁니다.
밀리테, 그렇게 될 겁니다. 당신이 그렇게 믿고 싶다면요.
디안 밀리테:로렌, 그만, 그만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을 것이 뻔했다.) 이게, 무슨... 무슨 짓이야. 우리한테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네가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면 안 돼. 알잖아. 이걸 어떻게, 내가 모른 척하길 바랄 수가 있어? (손에 달라붙는 피의 감촉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당신의 그런 태도에 발렌틴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쉽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딘. 아무 일도 없었어.
그저 그렇게 알고 넘어가 주면 안 될까?
디안 밀리테: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렇게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손 문질렀다. 끈적하다.) ...이젠 그럴 수 없는 걸. 난 그런 인간이니까.
플로렌틴 발렌틴:때가 되면 전부 말해줄게. 이번 한 번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를 믿어주면 안 돼? 나를 사랑하잖아.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내 애정이라도 믿어줘... (손 뻗어 네 손목 붙잡았다.) 날 외면하면 그때는 더 이상 네 곁에 있어줄 사람이 없을걸. 네게 선택지가 있을까, 응? 디안...
디안 밀리테:...모두 말해줄 거지? 같잖은 침묵이나, 거짓말로 넘기지 않고. (여전히 네 온도는 내게 다정했고, 그래, 난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널, 믿어. 플로렌틴 카사 발렌틴. 네가 유일하다는 걸 믿어. 내 밤을 같이 새줄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 중얼거렸다. 체념 같기도 하고, 세뇌 같기도 한 말 끊임없이 되뇌였다.)
그야말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말 못할 사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발렌틴은 그저 같은 대답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차라리 벽을 두고 말을 거는 것이 이보다 더 효율적일 것 같네요.
그는 당신에게 단 한 조각의 진실조차 공유하지 않으면서 당신을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지고 쓰다듬습니다.
당신에게 닿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만적인 애정입니다.
당신의 두 손에 끊임없이 새롭게 흘려내는 간절한 사랑입니다.
붙잡았던 손목을 끌어 발렌틴이 당신을 안으면,
바닥에 고인 핏물의 비린 내음이 발치를 적십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물론이지. 나는 널 위하지 않은 거짓은 행하지 않으니까. 네 믿음만이 내가 말하는 이유라서... (조그맣게 속삭이지만, 안타까운 표정을 짓지만, 유감이라는 듯 기만적으로 굴지만... 그럼에도.) 사랑해, 딘. (입가에 번지는 것은 틀림없는 미소. 서리는 기쁨.) 의심하지 말아. 네가 가진 유일한 걸. (버리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그리 속삭이는 음성은 어제와 같이 부드럽고, 다정한 음률을 지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밀리테.
✎:당신의 연인은 살인자입니다.
아직도 바깥에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브랜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겠죠. 당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 방을 박차고 나가 그들에게 발렌틴을 고발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 한들 그가 사람을 살해한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당신은 원한다면 이대로 발렌틴의 살인을 묵인해줄 수도 있습니다.
✎:바깥은 아직도 폭설이 쏟아져 내리고 있으니, 그 하얀 설원 가운데 시체 한 구 숨기는 것 즈음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겁니다.
당신이 이대로 입을 다물어 준다면 쉘터의 사람들은 브랜이 멀리 떠난 줄로만 알겠죠.
시간이 흐르면 아마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추측할 겁니다. 그 누구도 발렌틴의 살인을 눈치채지 못하겠지요.
그렇게 이날의 일은 당신과 발렌틴 사이의 비밀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대로 발렌틴을 더 설득해 보는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에게서 제대로 된 설명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보나 마나 쳇바퀴를 돌리듯 같은 대답만을 반복할 것이 자명합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디안 밀리테:아, 그래. (내 가진 것은 오로지 너 하나 뿐임을 내가 어찌 의심하리... 내 세상이 모두 무너졌을 때 내 손을 잡아준 건 신이 아니라 너였다.) 내가 어떻게 너를 버려... (그것은 신을 고발하는 것과 동일하다.) 너 없는 세상이 너무 두려워, 네 사랑이 없을 날들이, 그래서 지금 보이는 이 암흑보다 더 어두울 하루가... (사랑해. 사랑해, 로렌, 정말로... 네가 무어든 상관하지 않아. 난 널 항상 긍정해야 하니까.) ...시체는 네가 숨길 수 있지? 밖에 눈이 많이 내리나 봐. 던져두기만 하면 나머진 눈이 모두 덮어버릴 거야...
당신의 긍정에 기뻐하는 기색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시체가 발치에 있더라도요. 발렌틴은 가만, 당신에게 입을 맞춥니다.
그 부드러운 입맞춤은 마치 대가로서 당신에게 선물하는 애정과 고마움 같습니다.
그럼, 딘. 할 수 있어. 다디단 속삭임 뒤에 다시금 입을 맞춥니다.
.
.
.
플로렌틴은 디안이 잠에 들기 직전까지도 곁에 붙어 있습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다감하게요.
한 치의 틈도 남겨두고 싶지 않다는 듯이.
사랑을 읊습니다. 아니, 사랑이라고 하기에 모독적인가요. 그래도 발렌틴과 당신의 애정입니다.
검사소에 방문한 네 혈액에서 역병 감염원의 특수 단백질 구조에 대항하는 항체가 발견되었어.
이후 제약 회사의 한 연구 기관에 잡혀 약 2개월간 끔찍한 인체실험을 당했어. 네가. (목소리에 물기 스민다. 쥐어짜내듯 말했다.)
나는 2월 29일, 연구소 건물이 무너지는 틈을 타 너를 구했고... 그렇게 곁으로 다시금 오게 했지. (한참이나 말 없다가...)
너는 실험의 여파로 부분적인 기억을 잃어서, 지금껏 연구소와 검사소를 착각하고 있던 거고.
브랜은...
플로렌틴 발렌틴:정말로 이거, 들어야 해? 디안. 나는 네가 내게 묻지 않고도, 아니,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디안 밀리테:내가 꿨던 꿈이, 실제였구나. (그 목 끝까지 차오르던 알 수 없는 고통이 모두...) ...들어야 해, 플로렌틴. 이건 나로 인한 문제야. 지금까지는 네가 모두 떠안고 있었지만... 난 네가... 나로 인해 이런 짓을 저지르길 바라지 않아.
말해줘, 브랜은?
플로렌틴 발렌틴:살아있는 인간을 죽이면, 하나씩... (하나씩 죽여갈 때마다. 목이 매였다. 목소리가 잠기지만, 억지로 끄집어낸다.) 내 시간을 늘려주겠다고 했어. 나는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거든. 시체 밟아올라 연명하는 목숨이야. 어때, 딘. 역겨워? 당장 도망치고 싶어? (언성 높아진다. 아, 이제 정말 어떡하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냥...)
디안 밀리테:그게, 무슨. ...무슨. (네 맥박 치는 손목 붙잡았다. 여전한 네 온도였고, 모든 건 그대로일 텐데, 사실 하나가, 너무 무거운 사실 하나가...) 네가 사람을 죽여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나오는 목소리 지독하게 초라했다.) 네가, 네가 지금 살아있는 게 다른 사람의 삶을 밟아 살아있는 거라고. (아득했다. 네 인생이 너무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다. 넌 대체 어떤 하루를 살아온 거지?) ...로렌, 내가. (숨이 막힌다. 손이 떨렸고, 널 잡았지만 동시에 놓고 싶었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이젠 모르겠다. 이것도 사랑인가?) ...떠나.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는 걸. (아, 모두 내 탓이다...)
발렌틴은 더 이상 당신에게서 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손을 뻗으면, 발렌틴의 얼굴에 감긴 붕대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집니다.
아, 이 끔찍한 역병의 마수는 기어코 당신의 연인에게까지 손을 뻗은 이후였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이미 오래 전에 걸렸어. 네가 그곳에 끌려간 뒤로 심하게 악화되어서... (담담하게 가라앉는 듯싶다. 목소리는 일단 그랬다.) 죽음의 문턱에서 악신의 계약에 응했어. 이렇게라도 네 곁에 있고 싶었어. (이게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야. 알잖아.) 하지만 세상의 사람을 전부 죽여서 네 곁에 있기엔... (말이 끊긴다. 눈 앞이 흐렸다.) 어차피 그래도... 그래도 널 영원히 취할 수는 없어. 산 채로... (나는 이렇게 또 다시금 기억 속에 남겨지기를 바라야 했다.) 얼마나 생존자가 더 남았을지 몰라. 나는 네가 살았으면 해서. 엘렌에게 말해뒀어. 너는 저 무리에 섞여서 오래 날 기억해주는 거야. 아득하게 먼 미래까지. (눈물 뚝뚝 흐른다. 하지만 절망이라기보다는 집요함이다. 삶. 제 삶이 아니라, 네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이미 몸속의 장기는 손쓸 도리가 없대. 한쪽 얼굴까지 썩어가고 있어. (숙이던 고개를 들었다. 네 손을 감싸 제 목덜미에 대었다. 온기를 앗아간다.) 악신과의 계약이면 네 눈을 치료하는 건 너무 간단했어. (...) 그거 알아? 나는 네게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었어... 기껏해야 보여주고 싶은 추레함이라면 내 밑바닥이지. 네가 보는 세상은 아름답지 않아서는 안 될 것 같아. 네가 네 시야를 빼앗았어.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빼앗긴 거야. 하지만... 그래도 넌 나를 사랑하지? 너는, (...) 너는 나밖에 없어, 딘... (제발. 강요였으나 부탁과도 같다.)
디안 밀리테: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왜... (묻는 형태였으나 답을 바라진 않았다. 그보다는 원망에 가까운 형태.) ...네가 그렇게까지 내 곁에 남을 줄은 몰랐어. 나는, 네 이기심을 믿었는데. 네가 끝이 오면 무엇보다 너 자신을 먼저 챙길 줄 알았어. (그러나 입 밖에 말을 내놓으며 곧 자신의 모순을 깨닫는다. 아, 나는 너를 여전히 일반적인 인간에 대입해서 보고 있었던 걸까? 모두가 나를 버렸고, 타인보다는 자신을 위했다. 그건 어떠한 진리처럼 제 뇌리 속에 박혀있었고 생각의 근원과도 같았기에 지금까지는 파헤쳐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너에게 난, 뭐야? 난 네게 어떤 존재이지? 우리는... (너무 많은 세월을 함께했고, 사랑했는데, 남은 건 알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싫어. 이젠, 싫어... 알아. 너 없는 하루가 얼마나 허무한지, 매일 네 이름 외우다가 지쳐 쓰러지면 꿈 속에서나마 널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겠지. 이미 잊은지 오래 된 목소리를 되짚고,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불렀는지 그거 하나만 떠올리다가, 정말 네가 날 사랑하긴 했는지 평생을 의심하다가 죽어갈 거야. 나는, 로렌... 나는, 그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어. 차라리 날 죽이고 네가 살아. 그 편이 더 나아...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굴 죽여도, 내 눈을 앗아가도, 그래서 네 손길 없으면 못 살아남는 채로 있어도 괜찮으니까. 사라지지 마. 곁에 있어. 약속했잖아. 약속을 지켜, 플로렌틴 카사 발렌틴. 또 네 좋을 대로 영원으로 도망치지 말고! (분명한 분노, 그 원인은 두려움에 있다. 네가 없는 아침의 두려움...) ...난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있어 줄 거지? 모두를 죽여.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네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나는, 무엇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너조차도.)
플로렌틴 발렌틴:이게 내 이기심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향한. (결국 실토했다. 내게 네게 영원히 숨길 수 있는 것은 없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고.) 사랑해, 딘... 나는 그게 좋아. 응. 그런 것 같아. 네가 내 무딘 칼에 아주아주 천천히 목숨 잃어가는 게 죽도록 좋아서, 그래서 나는 항상 이런 선택을 해. 너를 죽이는 나라도 사랑해주는 너를 너무 애정해서. (차게 쌓인 눈 위로 작은 흔적이 방울져 떨어진다. 내가 네게 가지는 죄책이 없어 이 모양이라. 일말의 후회도, 미안함도, 사죄할 마음도 없어서 울었다. 누군가는 환희의 눈물이라고 칭할 법도 한, 그런 행위-행위라고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였다. 힘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소리가 엷어 웃음과 같은 울음소리였을지도 몰랐다.) 너는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을 했어! 두 번이나, 사랑하는 것에 시야를 잃었네. 이젠 어떡해. (나지막한 외침과 같다. 이것조차 사랑일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맞을까? 어쩌면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죽을 듯 아끼는 너를 죄 망칠 각오를 해버린 건 아닐까?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 지고했다.) 너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했지. 예전에도... 너는 너무 미련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리고 나는...) 내게 너는... (약혼자? 연인? 웃기기도 하지. 얄팍했다.) 내가 가진 전부. (모르겠어... 네가 나를 망쳤어. 죄를 넘기기는 이다지도 쉬웠다.) 나는 네가 아파도 괜찮아. 물론 마음이 많이 쓰리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건 안 돼. 네가 너무 아파서, 사랑하길 놓는 건 안 돼. (벽을 짚는다. 밑바닥에 끝이 있다면 필시 현재이리라고.) 너를 사랑하는 내가 너무 싫은 것 같아... 사람이 이렇게까지 깊게 사랑할 수 있을까? 딘. 이건 맹목이야. 너는 이런 것까지 다 받아줄 수 있다고 말하는 거라고, 지금. (몸에 힘을 풀었다. 맥없이 벽에 기대어 주저앉는다.) 도망치게 해줘.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내 생에 최선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최악의 선택을 했고, 또 후회하지 않았으므로.) 딘. (목소리보단 떨림을 꾸역꾸역 이어붙인 것 같다.) 아니야, 미안해, 사랑해줘... 약속 지킬게. 후회하지 말아. 저 사람들을 잔악하게 다 죽이고, 또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고, 우리에게 온기를 준 사람들을 짓밟아도 넌 후회하면 안 돼. 그러겠다고 해.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디안 밀리테:(제일 먼저 느낀 것은, 안도. 불행에 잠겨 죽어도 넌 여전히 내 옆에 있겠구나. 시야에 네가 잡히지 않아도, 네 욕심, 그것 하나는 여전한 것에 안심했다. 네 기만, 사랑, 맹목, 뭐라 딱 집어 칭할 수 없는 것이 네게 만연함이 기뻤다. 제대로 미친 사고였으나, 우리 둘 중 누구도 그걸 지적할 사람이 없으므로...) 하지만 널 사랑하지 않을 하루를 견디지 못해, 나는...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아니, 아니야... 너여야 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들에게는 그저, 호의, 몸에 베인 예의, 그 정도가 딱 알맞겠지. 거기에 사랑이란 정의는 과분해. 내 사랑은 네게서 나오는 걸... 언제나, 날 사랑해줄 이는 너밖에 없으니. (손 올려 네 눈물 훔쳤다. 상황을 인식한다. 울음, 웃음, 환희? 알 수 없는 정보값들 따라가기 벅찼다.) 단 한 번도 내 선택이 바보 같지 않았던 적은 없어. 돌이켜보면 난 항상 최악의 길을 걸어왔고. 근데, 그럼에도, 이것 하나면 괜찮을 것 같아. (손에 닿는 눈물, 미약하게 달아오른 네 뺨의 온도, 비수를 내리 꽂는 말을 할 때도 다정한 네 목소리...) 네 전부가 나구나. (웃었다. 이럴 때 웃음만큼 사람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고) 맞아, 내가 널 망쳤어. 이 모든 건 내 탓이고, 내 죄이며, 내 불행일 뿐이니까. 너는 그냥 이 바닥에 떨어진 불쌍한 이고... (널 있는 그대로 끌어 안았다. 네 귓가에 속삭인다.) 네 사랑은 너무 거대해. 그대로 안고 있으면 수축해 빛조차 삼켜버릴 지도 몰라. 하지만, 로렌, 난 평생 사랑이 고팠어. 내 모든 불행이 사랑에서 시작됨을 알 건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놓지 못해. 그건 그래... 내가 이상한 걸로 하자. 네 잘못은 내게 있어. 그걸 기억해. 넌 이제 나에게 손 내밀면 돼. 알아서 죽어가는 나를 구해. 네 욕심을 채워. (그럼 네 거대한 사랑은 내 것이 되고, 나는 네 것이 되는 거야. 이어진 네 사랑해달라는 말에 다시 웃었다. 상냥함을 가득 담아.) 사랑해. 네가 날 두고 기억 속에서 영원을 살겠다는 헛소리 지껄이며 떠나지만 않으면, 네 죽음마저 사랑할 자신 있어. 저들의 온기는 너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하니... 로렌, 네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돼. (이상하지, 분명 이곳이 바닥일 텐데도, 이 순간만큼은 찬란하다고 느꼈다. 찬연한 생보다 아름다운 것이 네 사랑이었다. 오직 이 세상에서 너만이 줄 수 있는.) 네가 날 죽여도 기쁘니, 오로지 날 떠나지만 말아. 사랑해, 언제나... 사랑해, 로렌.
언젠가 발렌틴의 끝이 와도, 그럼에도 당신만큼은 살아남겠죠.
설령 이 쉘터의 사람들이 모두 감염되어 죽는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항체를 생성하는 한 당신만큼은 세상의 끝까지 무사할 겁니다.
발렌틴이 당신을 감금한 연구소를 무너뜨리며 당신을 빼내온 순간, 이는 어찌 보면 예견된 결말이었습니다.
발렌틴은 세상의 다른 그 무엇보다도 당신 한 명의 손을 잡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인류의 구원이었으며, 당신만이 멸망 가운데 구원받았습니다.
✎:발렌틴은 손목에 걸린 시계를 매만지며 자조하듯 남은 수명을 말합니다.
브랜을 살해한 것은 그저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번 것뿐이라고 말하면서요. 이미 그의 손은 당신이 만나지 못했던 수많은 생존자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수색을 지속해왔던 그 오랜 시간 동안, 대체 몇 명의 목숨이 스러졌는지 모를 일입니다.
발렌틴의 고해에 당신은 손을 놓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운 음률을 지녔습니다. 아마도 이게 발렌틴의 최선이었을 겁니다. 썩어가는 내장을 붙들며 생존자를 수색하고, 가능한 한 당신의 곁에 오래도록 남고 싶다는 바람을 내려두기까지 얼마나의 낮과 밤을 반복하며 고민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마침내 결단했을 땐 기뻤을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의 이기심을 당신의 애정으로 영원히 메울 수 있을 테니. 설령 당신이 발렌틴 자신을 잊고 살아간다 해도… 더 이상은 살인을 자행할 힘조차 없이 지쳤어요.
그는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는 짐승과 같이 이 거대한 무대의 종막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온 이후 홀로 남을 당신의 미래를 고민하고 계획했습니다.
끝까지 이기적인 다정으로, 당신에게 끝까지 단 한 조각의 진실도 나누지 않으면서요.
그토록 절실하고도, 아플 만큼 기만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간 당신의 연인이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과, 그의 수명은 다른 사람의 생명의 불씨를 꺼뜨리며 이어진다는 사실을요.
당신의 연인은 기만자이며, 살인자입니다. 멸망한 세상의 악인이며, 그의 하루하루는 타인의 생명을 제물로 삼습니다. 그는 무고한 생명을 살해하며 당신과 함께할 시간을 마련합니다.
아마도 그는 언젠가, 필연적으로 온몸을 역병에 잠식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테지요. 당신을 이 세상에 남겨둔 채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의 곁에 남기를 선택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 사이에 더 이상의 비밀은 없습니다. 그동안의 기만적인 사랑은 고이 접도록 해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진실한 낯으로 서로를 마주합니다.
우리의 진실한 사랑은 짙은 피비린내가 납니다. 세상에 들끓는 썩은 시체보다도 지독한 악취입니다.
그야말로 멸망한 세상에 걸맞은, 이기적이고도 잔인한 사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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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거세게 휘몰아치던 눈바람이 멈춘 세상은 고요합니다.
당신은 묵직한 배낭을 들고 쉘터를 나섭니다. 보이지 않는 두 눈으로 까마득한 앞날을 가늠합니다.
플로렌틴 발렌틴:갈까, 딘.
✎:그런 당신의 한 손을 잡아주는 손길이 있습니다. 부드럽지만 견고하게. 언제까지나 당신의 옆에 남아 당신의 곁을 채워줄 발렌틴이 앞길을 밝히듯 당신을 이끕니다.
디안 밀리테:응, 로렌.
✎:두 사람은 오늘도 생존자를 찾아 나섭니다. 그들의 삶을 강탈하고, 앞으로 함께할 시간의 양분으로 삼도록 해요. 이 멸망한 세상에선 그 누구도 당신을 비난하지 못합니다.
당신과 발렌틴의 여정은 계속됩니다. 두 사람의 발치에 진득한 핏물이 고이고 고여, 더는 흐를 수 없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