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nture Time - BMO
BEFORE YOU EXIT

TRPG

[플리] February 29th, XXXX

1975°F 2023. 1. 15. 12:16

 

앤오님의 은혜

 

 

음음
 
준비된 디티테~
 
뭐시키지...
 
디안 밀리테:(아;)
(안시키는방법은??)
 
오이시쿠나레모에모에큥 혹은 야옹~
 
디안 밀리테:..........................야옹,,,
 
좋아요 귀엽습니다^^ 출발~
 
디안 밀리테:출발~~
 
.
 
.
 
.
 
당신은 눈을 깜빡입니다.
 
흐린 시야가 바로잡힐 즈음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보입니다. 차가운 한기가 피어오르는 잿빛 복도.
 
웅성거리는 소음 틈으로 누군가를 호명하는 목소리. 코끝을 스치는 약품 냄새. 시체가 썩어가는 악취.
 
서린 바람에 철제 창문이 덜컹거리며 음울한 분위기를 더합니다.
 
✎:이곳은 검사소입니다.
당신의 곁으로 수없이 낯선 인물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들의 얼굴에 꽃핀 것은 공포이며 불안입니다.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가 웅성웅성 고막을 두드립니다.
기나긴 대기열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수심에 잠겨 있습니다.
개중 누군가는 울음을 터트리고, 누군가는 공포에 몸을 떨며, 누군가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속삭입니다.
 
“신이시여, 저희를 가엽게 여기소서.”
 
✎:그 인파 가운데 당신은 누군가의 기도를 듣습니다.
당신은 그 간절한 음성을 기억합니다. 분명 검사를 받기 위해 이 긴 줄에 몸을 맡겼었지요.
 
벽에 걸린 달력의 붉은 글씨는 새로운 한 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요, 1월 1일, 새해의 첫날입니다.
 
그러나 신년을 축하하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당신에게 들리는 것은 오로지 고통, 울음, 비명과도 같은 신음뿐입니다.
 
✎:겨울바람보다 매섭게 찾아온 역병이 종말의 노래를 속삭입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감염자가 발견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은 시점, 인류는 이미 사 분의 일 이상의 인구를 잃었습니다.
애초에 이것을 질병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몸이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초기증상은 갑작스러운 두통이나 복통, 출혈과 가슴 통증을 포함해 천차만별입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감염자 모두 체내의 특정 장기에서 시작해 주위로 번지듯 하나씩 내장이 망가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몸 안쪽에서부터 벌레에게 산채로 파먹히듯이요.
 
✎:혹자는 주요 기관이 붕괴해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 반면, 혹자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몇 달 동안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운이 좋게 주요 장기를 피했다 한들 감염이 번져 피부조직까지 괴사하고 나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역병에 걸렸던 시체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부패하고 망가집니다. 덕분에 거리에는 미처 처리하지 못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습니다.
빠르게 무너져가는 세상 틈에서 그 어떠한 저명한 학자도 이 병의 원인이나 치료법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격리한 채 마약성 진통제를 놓아주는 것이 현존하는 최선의 방편입니다.
세계 각국은 더 이상 사망자와 감염자의 통계를 내지 않습니다. 언론은 모든 방송을 중단한 채 같은 문장만을 반복합니다.
 
“현재 전 세계에 원인불명의 질병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감염자는 보호시설에 격리하고 있으니
 
모든 시민분은 이른 시일 내 가까운 검사소에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신속한 협조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현재 전 세계에 원인불명의 질병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두통, 복통, 출혈, 흉통을 포함한 기타 이상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지금 즉시 질병 관리센터에 연락해….. ”
 
✎:아무런 치료제도, 해결책도 없는 지금, 인류는 멸망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에 검사소가 세워졌으나, 이는 감염자에게 내리는 이른 사형선고나 다름없습니다.
그 사실을 상기하거든 검사소의 회벽이 마치 망령의 울음같이 일그러져 보입니다.
 
디안 밀리테: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2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문득 당신은 빛바랜 건물의 회벽을 바라보며 미묘한 기시감을 느낍니다.
 
생각해보니 분명히 이 건물은… 이즈음에 커다란 금이 가 있지 않았던가요?
 
…아, 그랬었지요. 당신은 분명 무너지는 건물의 파편에 깔려……
 
두 눈을 심하게 다쳤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아무래도 꿈이겠네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요?
 
욱신, 당신은 갑작스레 두 눈에서 끔찍한 통증을 느낍니다.
 
마치 날카로운 것이 연약한 안구에 파고들어 상처를 내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미처 자각하기도 전에 눈앞의 상이 천천히 흐려집니다.
수마에 잠겼던 몸이 억지로 뭍으로 꺼내지는 듯한 감각입니다.
 
당신이 잠들어있던 의식을 깨우면… 눈앞은 까마득한 암전입니다.
 
감긴 눈꺼풀을 더듬어보거든 그 위에 마른 붕대의 감촉이 까끌까끌하게 느껴집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악몽이라도 꾼 거야?
 
누군가 당신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쥡니다.
 
다디단 음성이 차가운 공기를 타고 당신의 뺨을 간질입니다.
 
그 목소리에 당신은 비로소 돌아온 현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요, 이곳은 당신과 발렌틴이 임시 거처로 삼고 머물던 곳. 오늘은 멸망해버린 세상에 또 한 번 찾아든 추운 겨울날입니다.
 
디안 밀리테:...로렌, 로렌이야?
악몽은 아니고... 검사소에서의 꿈을 꿨어.
 
발렌틴이 당신에게 다가올 때면 당신은 그의 옷가지에 묻은 희미한 시취와 혈향을 맡습니다.
 
그의 몸을 두른 기운이 겨울의 밤공기처럼 차갑습니다.
 
당신이 잠든 사이 발렌틴은 바깥을 수색한 모양이네요.
 
플로렌틴 발렌틴:그게 악몽이지, 뭐... (손 얽는다.) 날이 추워 오늘은 오래 걸어야 할지 모르니 단단히 채비하자.
 
그러고 보니 오늘은 거처를 옮기는 날이었죠. 발렌틴의 말에 의하면 이 근방에서 조달할 수 있는 생필품은 거의 다 사용한 모양입니다.
 
이번에야말로 생존자를 만난다면 그들이 머무는 쉘터에 의탁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이는 우리가 수색을 계속해온 이유입니다.
 
디안 밀리테:악몽은 네가 없는 게 악몽이고. ... (따스하게 얽혀오는 것에 미소지었다.) 응. 이번에는 생존자를 만났으면...
 
발렌틴은 밀리테의 말에 가만 침묵을 둡니다. 아마 늘 그리던 미소겠지요.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잠깐 뭘 좀 정리하고 오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웁니다.
 
✎:발렌틴이 멀어지고 나면 당신을 감싼 세상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이제야 주변의 지리나 물건의 배치에 익숙해졌나 싶었는데 또 이곳을 떠나게 됐네요.
멸망한 세상에 이처럼 발전기가 달린 멀쩡한 건물이 얼마나 남았을까요?
그곳에 물과 식량은 충분할까요?
이미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겨왔으나, 그때마다 보이지 않는 앞날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발렌틴이 자리를 비운 사이 주변을 조사할 수 있습니다.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암흑뿐이나,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이미 눈을 감고도 보는 것처럼 이곳의 형상을 그려낼 수 있지 않던가요?
 
디안 밀리테: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주변을 더듬거리면 당신이 덮고 있던 [두툼한 이불], [리모컨으로 보이는 물건] 따위가 손에 잡힙니다.
 
디안 밀리테:(이불 더듬거리며 만졌다... 이건 들고 갈 수 있을까. 따뜻했는데.)
 
원체 낡은 이불이었지만 추위에 더 헤져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쉽게도 버리고 가야겠네요.
 
디안 밀리테:(툭툭 정리... 아쉽게 됐네.)(리모컨으로 보이는 물건 만졌다. 이건 무엇에 쓰이는 거지?)
 
아무래도 리모컨인 듯싶습니다. 버튼을 눌러볼까요?
 
디안 밀리테:(일단 아무 버튼이나 꾹...)
 
지지직- 불안정한 전파에서 흐르는 잡음이 들려옵니다.
 
아무래도 이 건물의 옛 주인이 쓰던 TV 리모컨이었나 봅니다.
 
몇 번 지직거리던 소음 끝에 익숙한 메시지가 들려옵니다.
 
✎:“인류는 종말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시점 정부는 모든 감염자의 격리를 해제합니다.
감염자를 격리 혹은 박해하는 행위는 질병의 확산을 늦추지 않습니다.
격리되었던 가족, 친구, 지인을 찾아 마지막 인사를 나누세요.”
 
이곳 주변에 방송국이라도 있던 걸까요?
 
전파는커녕 전기와 수도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장소가 허다한 판에 말이에요.
 
모처럼 잡힌 전파에도 TV는 일정 간격을 둔 채 같은 내용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모든 언론이 기능을 정지한 이후 자동으로 송출하고 있는 영상입니다.
 
이 지긋지긋한 음성 말고 새로운 소식을 기대했다면 과욕이었을까요?
 
디안 밀리테: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1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당신은 이 비슷한 음성을 들었던 때를 상기합니다.
분명 1월 1일, 검사소에 갔던 날이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당신의 두 눈은 멀쩡했었습니다.
사고를 당한 것은 그 이후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복도에 서 있었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은데. 그다음 건물이 무너져 내렸던가요?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혼탁하기만 합니다.
 
그저, 새빨갛게 변한 세상. 그 붉은 핏물 너머 당신을 간절히 끌어안던 발렌틴의 체온만이 여즉 선연합니다.
 
당신이 생각에 잠긴 사이 머지않아 발렌틴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집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오래 기다렸어? 비스켓이 좀 남았길래 가져왔는데.
 
테이블 위에 접시를 놓는 소리가 들립니다.
 
디안 밀리테:별로 안 기다렸어. 떠날 거라고 해서 정리를 좀 했고...
비스켓? 잘 됐다. 하나만 먹을게. (손으로 접시 위 비스켓 찾아 집었다...)
 
먹어보니 버석한 식감에 비해 의외로 맛은 나쁘지 않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그럼 다행이고... (하나 집어 먹어본다.) 맛이 거지 같아. (찌풀!) 이걸 먹으라고 만든 거야, 버리라고 만든 거야?
 
식자재를 구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점에서 무언갈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것이지요.
 
발렌틴은 투덜거렸지만요.
 
디안 밀리테:(옅은 웃음...) 이런 거라도 남아있는 게 어디야. 내가 맛있는 거라도 해줄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눈만 괜찮았다면...)
 
플로렌틴 발렌틴:사알짝... 그립긴 하지만. (음, 아니야.) 됐어. 어차피 식자재도 없는걸. (으쓱...) 아, 이 근방의 지도를 발견했어. 낡고 훼손되어 잘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병원과 방송국이 있고, 같은 선상에 대형마트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더라.
어디 먼저 갈까?
 
디안 밀리테:방송국... (아까 들렸던 전파의 출처인가.) 그러면 병원부터 가볼까. 뭔가 유용한 약품들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플로렌틴 발렌틴:좋아. 부디 누가 먼저 다녀가지 않았으면 좋겠네. 따로 챙길 물건 있어?
 
디안 밀리테:음... 아니. 없는 것 같아. (하고 네 손 얽혀 잡았다.) 잊지 말고 나 챙겨가.
 
발렌틴은 소리 내어 웃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나아가는 목적을 두고 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이내 준비를 마치고 거처를 벗어나려는 찰나 당신의 목에 두툼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감깁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선물! 요즘 날이 더 추워지더라. 너 원래 쓰던 건 너무 오래됐잖아.
 
뺨에 닿는 촉감으로 보면 복슬거리는 털실로 짜인 목도리입니다.
 
무슨 색인지는 알 방도가 없네요. 감촉이 부드럽고 좋습니다.
 
그러고 보니 원래 사용하던 목도리는 이리저리 낡고 더러워진 이후였지요. 당신에게는 그 얼룩이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디안 밀리테:원래 쓰던 것도 괜찮았는데... (목도리 만지작 거리다가 웃고는) 고마워. 훨씬... 따뜻하다. 무슨 색이야?
 
플로렌틴 발렌틴:베이지색 바탕에 연한 하늘색 털실. 하늘색이 아니라 노란색이면 더 좋았겠지만... 이걸로 만족하고 있어. (뿌듯...)
 
디안 밀리테:(베이지색 바탕에 연한 하늘색... 보지는 못하지만 대신 모양 상상하고) ...난 붉은색이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했는데. (농담 던지고) 고마워, 정말로... 난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게 없는데.
 
플로렌틴 발렌틴:존재 자체만으로... (농에 웃고 말 흐린다. 뒷내용은 알겠지. 대신 한 번 활짝 웃는다. 마주보지는 못할지라도.) 이만 가자!
 
단단히 채비를 마치고 나면 비로소 당신과 발렌틴은 정들었던 거처를 벗어납니다.
 
문을 열고 나서면 차가운 한기가 서늘하게 뺨을 훑고 지나갑니다.
 
바람이 닿는 부분이 차갑고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을 보면 아직도 눈이 내리는 모양이에요.
 
내뱉는 입김이 뿌옇게 공기를 흐릴 정도로 추운 날씨입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우리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발렌틴은 한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단단히 감싸쥡니다. 비록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여정일지라도 그의 손은 언제나 당신을 향하고 있을 테지요.
 
발렌틴은 당신의 곁에서 익숙한 음성으로 입을 엽니다.
 
그의 부드러운 말소리에 의하면,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길에는 당신과 발렌틴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저번 수색때 남긴 것이겠지요. 길가에 들어선 나무는 나뭇잎 하나 남아있지 않고, 나뭇가지를 따라 눈이 쌓여 있군요.
 
잘못 건드렸다간 눈 벼락을 맞기 십상이겠어요.
 
눈이 내리는 것과 달리 하늘은 그리 흐리지 않습니다.
 
아직 해가 높게 떠 있으며 그 덕에 온 세상을 덮은 눈이 더 하얗게 반짝이는 것 같다고, 발렌틴은 당신과 걸음을 함께하며 말합니다.
 
✎:당신이 보지 못하는 세상은 발렌틴의 음성으로 하나씩 채워집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에요.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요, 당신은 바람이 싣고 온 희미한 시취를 느낍니다.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 썩어가는 시체의 냄새입니다.
 
발렌틴은 맡지 못한 것일까요?
 
✎:그는 평이한 어조로 당신이 걷고 있는 세상을 읽습니다. 눈이 쌓인 모양새를 보아 아마도 차도 위를 걷고 있으며, 양옆으로 앙상한 가로수가 줄지어 들어서 있다고요.
 
…그런데, 평소보다도 악취가 조금 더 심한 것 같습니다. 착각일까요?
 
플로렌틴 발렌틴:지금이야 앙상하기 짝이 없지만, 봄이 오면 이 길도 눈이 녹겠지. 그럼 이렇게 메말라 보이지는 않을 거야. 예전처럼.
 
그는 조금씩 심해지는 시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온한 음성을 내뱉습니다.
 
디안 밀리테:봄날이 오면... (중얼거리다가) 근데 로렌, 아까부터 계속 냄새나지 않아? 그러니까, 시체가 썩는 듯한... (뒷말 흐렸다.)
 
디안 밀리테:
기준치: 50/25/10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당신이 한 발자국을 더 내딛으려던 순간, 발렌틴이 당신의 손을 옆으로 이끕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이쪽이야. (잠시 멈칫 하고 냄새 맡는 듯하더니.) 글쎄, 주변엔 반짝이는 눈뿐이야. 네가 무언가 착각했겠지. (평이한 음조...)
 
디안 밀리테:아, 응. (발 돌리다가 잠시 멈칫.) 하얗고 반짝이는 눈 뿐이라고...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하고 네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플로렌틴 발렌틴:길가에 피어있는 작은 들풀,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건물의 지붕에 자란 고드름이나 봄이 되어 피어날 꽃봉오리… 간간이 보이는 작은 소동물들도 있어. (차근히 걸었다.) 만약 걸리는 게 있다면 바로 말해줄게. 걱정하지 마.
 
발렌틴은 당신이 괜찮은지 살피더니 당신의 손을 조금 더 단단히 움켜쥡니다.
 
길에 자잘한 물건이 있어 위험하니 조금 더 꽉 붙들라는 말과 함께요.
 
.
 
.
 
.
 
얼마나 걸었을까요. 벌써 몇 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슬슬 목이 마르고 다리가 아파옵니다.
 
발렌틴은 텐트를 치고 길에서 밤을 보내야 할 것이라 말했었죠.
 
당신의 한낮은 언제나 어둡기만 한데 아직도 해가 높게 떠 있는 걸까요.
 
...
 
그렇게 몇 걸음이나 더 걸었을까요.
 
당신은 휘몰아치는 눈바람 사이로 얼핏 무언가 이질적인 소리를 듣습니다.
 
디안 밀리테: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7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짐승의 울음… 아니, 이건 사람의 목소리입니다.
 
이 근처에 생존자가 있는 건가요? 어쩐지 도움을 청하는 것 같아요.
 
당신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조금씩 그 울음 같던 음성은 크기를 더합니다.
 
''“...살려…. …와줘… 제발..”''
 
발렌틴 또한 그 음성을 들은 모양입니다. 그가 발걸음을 멈칫 멈추었으니 말이에요.
 
어떻게 할까요, 밀리테?
 
디안 밀리테:로렌, 로렌? 저기 생존자가 있는 것 같은데, 도와줘야... (네 손 살짝 잡아 끌었다.)
 
플로렌틴 발렌틴:아, 그래야겠지. (응당...)
 
당신이 소리의 근원지로 향하거든 머지않아 그 목소리는 당신과 발렌틴을 발견한 듯 절망 가운데 희미한 화색을 보입니다.
 
“사람이.. 사람이 있어, 누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 쿨럭 기침 소리가 터집니다.
 
아, 당신은 그 쇳소리 같은 음성을 압니다.
 
이건… 그 끔찍한 역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입니다. 몇 번이고 내뱉은 신음과 비명에 갈라질 대로 갈라진 탁한 목소리.
 
쇠로 목구멍을 긁어내는 듯한 거친 음성입니다.
 
그럼에도 몇 년 만에 만나는 생존자입니다. …이것을 생존자라고 부를 수 있다면요.
 
발렌틴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그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히 당신의 옆에 서 있습니다.
 
디안 밀리테:(로렌,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괜찮으세요?
(소리 나는 쪽을 응시... 제대로 봤을지는 모르겠다.)
 
“나를.. 살려, 살려달라는 게 아냐… 제발. 어떻게든…”
 
“약.. 약이라도 줘. 너무 아파.. 윽.. 끄윽.. 너무…”
 
남자는 반쯤 정신을 놓은 것처럼 같은 말만을 반복합니다.
 
쉬지 않고... 아파. 살려줘. 아니 죽여줘. 제발. 그만. 너무 아파. 약.. 약을 줘.
 
발렌틴은 작게 말합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마흔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성인 남성, 이미 얼굴의 절반 이상이 뭉개지고 다리 한쪽이 썩은 것 같아.
 
육안으로 뚜렷하게 썩어 문드러진 살점이 보인다면 분명 안쪽의 내장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후일 겁니다.
 
살아나기엔 아무래도 힘들겠죠.
 
이런 상태라면 제대로 된 대화를 하는 것은 무리일 겁니다.
 
✎:남자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진통제를 찾습니다.
당신이 자비를 베푼다면 적어도 죽기 전에는 그나마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겠죠.
발렌틴의 배낭에는 적은 양이지만 진통제가 있습니다. 언젠가 필요할 때를 위해 아껴둔 것이지만, 적어도 지금 당신과 발렌틴은 이 남자처럼 아파하고 있지는 않지 않던가요.
 
플로렌틴 발렌틴:어떻게 할까? 딘.
 
디안 밀리테:우리, 진통제 조금 남았었지. ...드리자. 우리한테는 필요 없으니까. ('아직'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플로렌틴은 당신의 말에, 망설임 없이 진통제를 꺼내어 건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하여간, 딘. 상냥하긴... (지나치게.)
 
남자는 마치 광인의 그것처럼 허겁지겁 약을 넘깁니다.
 
이 약이 그의 목숨을 살려주지는 못할 테지만, 적어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끔찍한 통증을 덜어줄 테지요.
 
산채로 몸이 썩어가는 것은 어떤 감각일까요? 아마도 끔찍할 겁니다.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떠한 고통보다도요.
 
“으… 흑.. 고마, 고맙습니다.. 정말.”
 
“이거, 앞으로, 저는 쓸 일이, 없을.. 테니까.”
 
✎:짤랑, 작은 쇳덩어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발렌틴을 바라보면, 그가 몇 걸음 다가가 무언가를 건네받았음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머지않아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미약해집니다.
 
간간이 앓는 듯한 소리를 내뱉으나, 적어도 못 견딜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 남자를 뒤로하고 발렌틴은 당신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줍니다.
 
✎:만져보거든, 차 열쇠입니다.
아마도 저 남자가 여기까지 타고 온 것이겠죠. 고마움의 표시였을까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발렌틴은...
 
플로렌틴 발렌틴: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차 한 대가 있어.
 
당신의 손을 잡아 이끕니다.
 
디안 밀리테:(이끄는 대로 걸으며...) 잘 됐네. 더 빨리 병원에 갈 수 있을 테니... (씁쓸한 투.)
 
그래요, 사람이 죽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나마 아직 숨이 붙어있는 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은 희소식입니다.
 
살점이 썩어가는 듯한 냄새를 뒤로하고 당신은 발렌틴과 함께 나아갑니다.
 
.
 
.
 
.
 
플로렌틴 발렌틴:일어나, 딘.
 
당신은 당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납니다.
 
방금 시동을 끈 듯한 차체는 아직도 열감이 남아 있습니다.
 
아마 깜빡 잠에 든 모양이에요.
 
오랜만에 눈밭을 헤치며 차에 타기 전 몇 시간 동안 걸어왔으니 피곤했을 법도 합니다.
 
디안 밀리테:...아, 잠들었었나. 깨우지 그랬어. (머쓱한 웃음...) 도착했어?
 
플로렌틴 발렌틴:굳이 깨울 필요는 없지. 잠든 네 모습 구경도 꽤나 즐거웠으니까... (이상한 발언...)
(가볍게 웃는다.) 근처에 병원과 방송국으로 보이는 건물이 보여.
 
디안 밀리테:잠든 모습 구경? 그런 걸 왜... (음. 예전에 너보다 일찍 일어나서 네 얼굴 보는 게 꽤 즐거웠던 것 같아 입 다물었다.) ...예정대로 병원부터?
 
플로렌틴 발렌틴:(유쾌하게 끄덕임...)
 
병원에는 비상시에 사용할 수 있는 의약품이 있기 마련이지요.
 
어쩌면 안전한 병원 내부를 거처로 삼은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방송국에는 언론이 기능을 정지하기 직전까지 수많은 정보가 몰려들었을 겁니다.
 
어딘가의 군사 시설이나 생존자들을 위한 쉘터가 존재한다면 그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
 
.
 
.
 
차에서 내려, 당신이 병원에 들어서면 건물에 부패해가는 것들의 악취가 가득합니다.
 
그야말로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입니다.
 
분명히 이 병원에도 한때 역병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가득했겠지요. 개중 생존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요?
 
플로렌틴 발렌틴:총 4층까지 있는 모양이네.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작동할지는 모르겠지만.
 
발렌틴은 살펴볼 테니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어디론가 향합니다.
 
디안 밀리테:(관찰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디안 밀리테: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8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어우;)
 
굿딘굿딘
 
✎:당신이 손을 뻗거든 딱딱한 병원 복도의 벽면이 닿습니다. 손끝을 타고 차가운 한기가 음산하게 퍼집니다.
벽을 짚고 이동하거든 주변의 방을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디안 밀리테:(가장 먼저 만져진 방부터 들어가보기...)
 
✎:복도를 기준으로 우측과 좌측에 각각 방이 세 개씩 있습니다.
문 바로 옆에 딱딱하고 네모난 팻말이 붙어 있으며, 만져보면 손끝에 작게 오돌토돌 튀어나온 점자가 느껴집니다.
 
[진료실/우측 첫 번째 방]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문은 낡은 소리를 내며 쉽게 열립니다.
 
디안 밀리테: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방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의료용 기계가 있습니다. 중앙부에 원형 의자가 두 개, 모서리가 맞닿는 곳에 [서랍이 달린 책상]이 있습니다.
 
디안 밀리테:(서랍 안에 뭐라도 있을까 싶어... 열어본다.)
 
✎:서랍은 총 세 개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서랍에는 잡다한 잡동사니가 들어있을 뿐입니다. 만져보아도 그다지 쓸만한 것은 잡히지 않네요.
두 번째 서랍을 연다면 안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발견합니다.
세 번째 서랍을 열거든 그 안에 가득한 서류와 함께 [작은 원통형의 기계]를 발견합니다. 만져보면, 두툼하게 쌓여있는 서류 위에 [재질이 다른 종이]가 하나 붙어 있습니다. 당신이 읽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요.
 
디안 밀리테:(종이는... 나중에 로렌한테 읽어 달라고 해야겠다. 열쇠, 기계, 종이, 다 쓸어 담아 챙긴다.)
(진료실 나오고... 다음 방으로 이동!)
 
챙기고 나오려는 순간...
 
기계를 손에 쥐면,
 
디안 밀리테: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4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원통형의 기계가 녹음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디안 밀리테:녹음기...? (사용할 수 있나. 일단 작동 시켜보려고 아무거나 눌러보기...)
 
디안 밀리테:(섬뜩한 내용이네...)
 
다음 방으로 이동합니다.
 
[검사실/우측 두 번째 방]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디안 밀리테:(작은 열쇠... 쓸 수 있나. 일단 문에 열쇠 넣어본다.)
 
맞지 않습니다.
 
디안 밀리테:(억지로 열어보려 시도...)
근력
기준치: 50/25/10
굴림: 26
판정결과: 보통 성공
(까비)
 
힘으로는 열리지 않는 모양이에요.
 
[약품 보관실/우측 마지막 방]
 
✎:퀴퀴한 냄새와 의약품 특유의 독한 냄새가 뒤섞인 장소입니다.
 
디안 밀리테: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29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벽면을 따라 커다란 진열장 같은 것이 늘어서 있습니다.
이미 누군가 유리를 깨고 필요한 물품을 전부 챙겨간 이후인지 대부분은 비어있습니다.
가장 안쪽에 놓인 [보관함] 하나만 잠겨있네요. 두드려보면 묵직한 쇳소리가 납니다. 이것만 유리가 아니었던 터라 부수고 가져가지 못한 모양입니다.
 
디안 밀리테:(진열장 깨진 유리 더듬거리다가) ...조심해야겠네. (보관함... 작은 열쇠 써본다. 이번엔 되길...)
 
✎:손끝에 작은 열쇠 구멍 하나가 느껴집니다. 무엇을 보관하는 건지, 상당히 튼튼해 보입니다. 힘으로 여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네요.
 
열쇠로 열어보면...
 
✎:수북하게 들어선 약통들이 만져집니다. 아무래도 이 열쇠는 약품 보관함을 열기 위한 것이었나 봅니다.
만져봐도 어떤 약들인지는 구별할 수 없습니다.
 
디안 밀리테:(진통제... 찾을 수 있으려나? 뒤적거리기!)
기준치: 50/25/10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진통제는 없는 모양입니다.
 
디안 밀리테:(왜 제일 중요한 약을 안 넣어 놓는 거야... 아오.)
(일단 있는 대로 챙겨보기... 나중에 로렌이 알려주겠지.)
 
챙깁니다. 방에서 나오면 좌측 복도를 조사할 수 있습니다.
 
디안 밀리테:(좌측 복도 제일 첫 번째 방부터 들어가 본다...)
 
[입원실/복도 좌측의 방]
 
복도 좌측의 방은 전부 입원실인가 봅니다. 명패가 만져지네요.
 
✎:진료실의 맞은편에 101호실이 있으며 그 옆으로 102호실, 103호실이 이어집니다. 101호와 102호실은 깔끔하게 비어있습니다.
103호실의 문은 닫혀있습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문이 잠겨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안쪽에서 끔찍한 악취가 새어 나옵니다. …이 문을 정말 열어야 할까요?
 
디안 밀리테:(오... 악취가 생길 이유 101가지 상상하고 그대로 뒤돈다.) 103호는... 안 봐도 될 것 같네.
 
✎:당신은 문을 열지 않기로 합니다.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아마 썩어들어가는 누군가의 무덤이었을 겁니다.
그것이 몇 개월 전인지, 몇 년 전인지는 몰라도요. 그 부패한 시체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습니다.
 
디안 밀리테: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2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문득 당신은 다시금 이 세상에 그 끔찍한 역병이 창궐했음을 상기합니다.
 
인류의 99퍼센트 이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질병.
 
몇 년 만에 만난 유일한 생존자조차 그 질병에 머지않아 숨이 멎었었죠.
 
✎:어쩌면 정말 이 세상에는 당신과 발렌틴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이나, 발렌틴이 감염되거든 다른 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만약 발렌틴이 당신을 떠난다면, 당신은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게 될까요?
만약 당신이 감염된다면 발렌틴은……
 
지금껏 두 사람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신의 축복일지도 모릅니다.
 
디안 밀리테:...축복 받은 걸까. (그동안 우리 둘 중 누구도 감염되지 않은 것에 대해. 둘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되는 이 처지가 조금 슬펐다.)
 
밀리테가 조사를 마칠 즈음 비상탈출구의 계단을 따라 발렌틴이 1층에 돌아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아 계단을 살펴봤는데 2층 이후로 올라가는 길이 막혀 있어.
위쪽에 살펴볼 만한 건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뭔가 찾았어?
 
디안 밀리테:아, 로렌, 왔구나. (주섬주섬... 약품이랑 녹음기, 종이 꺼내고) 1층을 조금 돌아 다녀봤어. 쓸만한 약 있으면 따로 네가 챙기고... 아, 그리고 이 종이에 뭐라 써져있는지 읽어줄 수 있어? (종이 건낸다!)
 
플로렌틴 발렌틴:
의료
기준치: 1/0/0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기준치: 50/25/10
굴림: 76
판정결과: 실패
(약품 살펴보더니...) 전부 사용 기한이 지난 것 같아. 마약성 진통제네. (아, 아까워라!)
그리고 종이는... (한 번 읽어본다.)
음, 별 내용 아닌 것 같긴 한데... 읽어줄까? (종이 집고 갸웃... 함.)
 
디안 밀리테:중요한 게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음... 고민하더니) 그래도 한 번 읽어줘.
 
발렌틴은 조곤한 어조로 서류를 읽기 시작합니다.
 
디안 밀리테:(심리학 굴려도 되나요? 종이에 써진 글 그대로 다 말했는지!!)
 
가능합니다.
 
디안 밀리테: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68
판정결과: 실패
 
담백한 어조만으로는 알 수 없겠습니다. 그러나 강행 가능.
 
디안 밀리테: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66
판정결과: 실패
(앟...)
 
구태여 발렌틴이 당신을 속이려 할 리가 없습니다. 피차 아는 사실이지요!
 
단조로운 목소리가 맺어집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더 이상 둘러볼 장소가 없다면 나갈까?
 
디안 밀리테:응, 챙길 건 다 챙긴 것 같고... 진통제를 못 챙긴 것 하나 아쉽네. (가방 맸다.) ...그럼 방송국으로 가볼까?
 
그렇게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방송국으로 향합니다.
 
.
 
.
 
.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막 옮긴 찰나, 발렌틴이 잠시 곤란한 기색을 보이며 걸음을 서서히 늦춥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안쪽이 상당히 어둡네.
 
벌써 밖이 그 정도로 어두워졌을까요?
 
플로렌틴 발렌틴:큰 건물이니 발전기가 있을 법도 하지. 잠시 둘러보고 올게.
 
디안 밀리테:(해가 지기라도 한 건가...) 응. 너 다녀오는 동안 나도 좀 둘러볼게.
 
발렌틴은 낯선 지형에는 익숙하지 않을 테니 무리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비웁니다.
 
이상하네요. 충분히 따로 조사하는 게 효율이 있을 텐데 아까부터 혼자만 움직이니...
 
전에도 자주 그랬지만요.
 
물론 걱정하는 마음일 겁니다. 그래야만 해요.
 
점점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옵니다.
 
✎:발렌틴이 떠난 자리는 지독하게 고요합니다.
마치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아요. 눈앞은 어둡고, 이 거대한 암흑이 온 세상의 전부인 것만 같습니다.
괜한 생각에 잠겨 들지 않으려면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발렌틴이 올 때까지 어딘가에 앉아서 휴식하는 것도 좋겠죠.
이렇게 처음 와보는 장소에 멋대로 돌아다니다간 자잘한 상처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할까요, 밀리테?
 
디안 밀리테:(눈이 안 보이게 되면서 괜히 생각만 더 많아졌어...) 가만히 앉아서 자책하는 것보다 뭐라도 하는 게 낫겠지. (일단 움직여 본다.)
 
움직이지 말라는 발렌틴의 말에도 당신은 발렌틴을 기다리는 사이 주변을 둘러보기로 마음먹습니다.
 
✎:방송국이라 하면 온갖 정보가 모여드는 곳이지요.
생존자들에 대한 단서를 기대해봐도 좋을 겁니다. 어쩌면 언론이 마비되기 전 이 질병에 대해 조사한 자료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멸망한 세상에서 그런 것이 중요할까요?
안쪽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문은 대부분 낡고 허름해 쉽게 열립니다.
벽면을 짚으면 손끝에 부식되어가는 것들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닿습니다.
어느정도 걷다 보면 복도 끝에 문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문고리를 돌리면 문은 쉽게 열립니다.
 
✎:문 안쪽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납니다.
오래된 서적이나 잉크, 화이트보드에 문질러놓은 마커펜에서 날 법한 냄새입니다.
 
손끝으로 더듬어 보면, 각이 진 사무실 책상 같은 것이 여러 개 놓여 있습니다.
 
✎:자리마다 배치되어있는 컴퓨터와 유선 전화기, 무언가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책장.
코끝에 가득 스치는 종이 냄새는 어딘가의 기록실을 연상케 합니다.
발치에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서류들이 밟힙니다. 얼핏 보아도 양이 상당해 보이네요.
이 정도 분량이라면 시력이 있었어도 전부 다 훑어보는 것은 무리일 겁니다.
 
디안 밀리테: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94
판정결과: 실패
 
강행 가능합니다.
 
디안 밀리테: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46
판정결과: 보통 성공
 
눈이 보이지 않는 이상 이 수많은 서류는 있으나 마나 한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정보를 모아두었다면 어딘가에 음성 파일로 된 자료도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소리를 통해 무슨 내용인지 유추할 수 있을 겁니다.
 
디안 밀리테:(병원처럼... 녹음기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5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손을 대는 곳마다 북슬북슬 거릴 정도로 쌓인 먼지가 손끝에 엉겨 붙습니다. 책상 위는 커피라도 쏟은 것인지 끈적한 느낌이 납니다.
한참 주변을 조사하다 보면 어딘가의 서랍 안에서 촉감이 고급스러운 만년필과 작은 명함 같은 것을 발견합니다.
 
디안 밀리테:(명함이라. 점자는 기대하기 어렵겠지... 일단 만져본다.)
 
역시나 점자는 찾을 수 없습니다.
 
디안 밀리테:음... (명함 내려놓고 만년필 집었다. 상태만 괜찮다면 로렌한테 선물할텐데... 하고 이리저리 만졌다.)
 
이리저리 만지다, 뚜껑 부분을 건드리면 달칵 소리가 납니다.
 
달칵, 하는 기계음 이후 삽십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의 날 선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 내용만 있지는 않을 텐데요. 다른 것도 녹음해뒀을 겁니다.
 
디안 밀리테: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49
판정결과: 보통 성공
(계속 만져보기...)
 
무언가 구시렁대듯 중얼거리는 음성 이후 목소리가 뚝 끊어집니다. 이 내용만 있을 린 없을 게 더 확실해지네요.
 
계속 만진다면 달칵, 하고 버튼이 한 번 더 눌립니다.
 
잡다한 의학 용어가 가득 섞여 있는 대화입니다. 이후 잡음으로 인해 더는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한때 어딘가의 저명한 박사들이 한창 이 역병에 대해 연구하고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었다는 소리 같습니다.
 
감염원은 특이한 구조의 기생충이라고 했나요?
 
✎:이상한 일입니다.
왜 여태 그 어떠한 TV나 기타 뉴스에서조차 관련된 소식은 하나도 들어볼 수 없었던 걸까요?
분명 그 누구도 질병의 원인이나 치료 방법 따위는 밝혀내지 못했다고 했었는데요.
언론이 마비된 이후 최근에 녹음된 것이었을까요?
어쩌면… 지금도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치료제를 개발하려 힘쓰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디안 밀리테:누군가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어쩌면, 이전의 세상으로...) ...좋은 소식이네. 로렌한테 전해줘야겠어.
(더 볼 건 없겠지... 슬슬 자리를 뜬다.)
 
...
 
그 순간,
 
이윽고 복도에서 발렌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당신을 찾고 있는 것 같네요.
 
플로렌틴 발렌틴:딘, 거기 있어?
 
디안 밀리테:아, 로렌. 응, 나 여기 있어! (외치며 급하게 움직임...)
 
당신이 그쪽을 향해 몸을 틀려는 순간 툭, 저도 모르게 건드린 높다란 서류 뭉치가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뒤늦게 팔랑, 팔랑, 천천히 떨어지는 종이들이 당신의 발치에 닿습니다.
 
만져보면 무언가의 사진 같습니다.
 
디안 밀리테:응? (사진인가... 일단 챙긴다.)
 
당신이 쏟아진 서류에 반쯤 덮여 있는 찰나, 문 바깥에서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립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여기 있었네. 여긴 기록실이나 자료실 같아 보이는데… 그 서류는 다 뭐야?
 
발렌틴이 보기에는 흡사 난장판이 따로 없었을지 모릅니다.
 
실상 당신이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바닥에는 잡다한 서류들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던 것 같았지만요.
 
디안 밀리테:그을... 쎄. 나도 읽어보진 못해서... 아, 근데 의미 있는 정보는 찾았어. (만년필 보여주며) 여기 녹음 되어있던 건데, 질병의 원인을 찾았다는 내용이야. 기생충... 이랬던가. 치료제가 개발될 수 있을지도 몰라. (옅게 웃었다.) 이 지긋지긋한 세상도 예전처럼 되돌아갈 수 있다는 소리야.
그리고... 이 사진. 무슨 사진이야? (들고 있던 사진 내밀었다.)
 
플로렌틴 발렌틴:(네 말에 걸음을 잠시 멈춘다.) 아, 치료제... (목소리가 잠시간 떨리는 듯하더니 이내 밝은 조로 이어 말했다.) 잘 됐네. 희망을 가질 수 있겠다... (마저 걸어간다. 사진을 보고 또 한동안 말이 없다.) 이 사진 어디서 났어?
 
디안 밀리테:응.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으니... (그리고 네 침묵에 의아해 하다가) 아무 종이나 집었는데, 마침 사진이여서. 기록실에 있는 사진이면 뭔가 정보가 있지 않으려나 해서 보여준 건데... 왜?
 
플로렌틴 발렌틴:아, 아니야. 그냥 여기는 서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진도 있어서 좀 놀랐네. 그냥 건물 같아. 쉘터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네. (사진은 네 손에서 가져간다.)
 
디안 밀리테: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97
판정결과: 실패
 
발렌틴이 사진을 테이블 위에 도로 올려놓는 소리가 납니다.
 
디안 밀리테:건물? 무슨 건물이길래... 아는 곳이야? 거기 가면 생존자들이 있다든가...
 
플로렌틴 발렌틴:모르는 곳이야. 아무래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아.
 
발렌틴은 쉘터나 생존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본다며 두툼한 서류 뭉치를 읽기 시작합니다.
 
✎:방금 당신이 쏟아낸 것만 해도 분량이 상당해 보였는데, 몇 분 내로 조사가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원한다면 발렌틴의 옆에서 그가 보는 자료의 내용을 읊어달라 할 수도 있겠죠. 그게 아니라면 미처 살펴보지 못한 곳을 마저 살펴볼 수도 있을 겁니다.
조사에 지쳤다면 발렌틴이 자료를 읽는 동안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밀리테?
 
디안 밀리테:(네가 곁에 있는데 굳이 두고 어디 가긴 싫다... 옆에 쭈그려 앉았고) 무슨 내용이야? 읽고 있는 서류들.
 
플로렌틴 발렌틴:(...) 그,러니까... (종이 팔락 넘긴다. 넘기는 속도가 느렸다.)
 
팔락, 하고 서류가 바닥에 떨어집니다. 발렌틴이 떨어뜨린 모양이에요.
 
디안 밀리테:(떨어진 종이 줍고...) ...왜? 말하기 곤란해?
 
...
 
플로렌틴 발렌틴:내가 네게 말하기 곤란한 게 어디에 있겠어. 내용이 너무 많아서 잠시 읽고 있었어. (...) 대강, 쉘터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아. 다행이야. 비행기 타고 날아갈 필요까진 없겠다... (가만 기운 없는 농담 던졌으나 그 기색은 아주 미세하여, 평소와 유사했다.)
 
디안 밀리테:(심리학 판정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디안 밀리테: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플로렌틴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디안이라면,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떨고 있는 것도 같네요.
 
디안 밀리테:...로렌? 왜 그래. (어깨 짚었다. 옅은 떨림이 느껴졌던가.) 쉘터에 가서 생존자들을 만나는 게 목표 아녔어? 그게 살아남는데 더 유리하니까...
 
플로렌틴 발렌틴:물론 맞지. 음, 이게 얼마만의 단서인지. 다행인 마음에 손이 다 떨리네... (얕게 웃음소리 내어 웃는다.) 내용이 더 많은 것 같아. 찬찬히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저기서 좀 쉬고 있을래? 다 읽으면 출발하자.
 
디안 밀리테:(뭘... 숨기고 있는 거지.) ...응, 그러면 난 잠깐 근처 둘러보다 올게. 유용한 정보가 더 있을지도 모르고...
 
발렌틴은 그냥 있으라고 말하려다 멈춥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좋아. 효율적인 편이 나으니까...
 
발렌틴은 서류를 보는 것에 이상하리만치 열중하는 듯 팔랑거리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들려옵니다.
 
기다리는 와중 주변을 마저 둘러보고자 한다면 어디선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작은 신호음을 눈치챕니다.
 
디안 밀리테: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삐- 삐-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신호음이 상당히 거슬립니다.
 
소리를 따라 가보면 책상에서 신호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들어보면 소리가 나는 곳은 한 책상 위의 유선 전화기입니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음성 메시지가 남아있는 모양입니다.
 
디안 밀리테:(전화기 만져본다... 음성 메시지 틀어보고)
 
전화기의 버튼을 누른다면 마지막으로 저장된 음성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과 함께 음성 메시지는 뚝 끊깁니다. 언성을 높이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대신 차가운 적막이 내려앉습니다.
 
디안 밀리테:(그동안 질병의 원인이나, 치료제에 관한 소리에 대해 하나도 못 들었던 것에 대한 이유인가...)
 
그때, 한구석에서 헛구역질을 막는 듯한 소리가 납니다. 발렌틴이겠네요.
 
디안 밀리테:...로렌?
 
플로렌틴 발렌틴:아,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거지 같은 서류에서 전염병 악화 과정을 너무 상세히 묘사해줘서 말이지. 나 비위 약한 거 알잖아. (농담!)
 
디안 밀리테:너가 비위... (약하다고? 그렇다고 해도 전염병 악화 과정을 읽는 것 만으로 헛구역질을... 짧게 생각하다가) ...대체 뭔 내용인데. 알려주면 안 돼?
 
플로렌틴 발렌틴:(한참 서류 들여다보는 듯하더니.) 굳이? 그냥 네가 알고 있는 내용이야. 피부가 썩는다던가, 장기까지 썩고, 그런... (진저리 친다.) 말하는 것도 힘드네. 거기 조금만 더 둘러보고 있어. 금방 다 읽을 테니까.
 
디안 밀리테:(읽을 수 없는 제 처지가 이럴 때 답답하다. 뭐라 더 말하려 입 벙긋거리다가 그냥 다물고) ...응. 더 둘러볼게. (부러 더 부산스레 둘러보기 시작했다.)
 
디안 밀리테: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6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운이 좋게 손에 잡히는 것은, 시력을 잃은 디안에겐 익숙합니다. 점자 기능을 보유한 E북 리더기네요.
 
신문 기사 같습니다. 읽어볼까요?
 
디안 밀리테:(운이 좋네... 읽어 본다.)
 
✎:신문은 생물학적으로 극소수의 사람에게서 생성되는 항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쪽 기사는 역병의 예방이나 치료에 있어 새롭게 발견된 항체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토론하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다른 한쪽의 기사는 이러한 항체 보균자를 대상으로 한 인체 실험의 만행을 고발하며,
교묘하게 항체의 활용 가능성에 대한 설명을 짜깁기한 형식입니다.
 
마침 발렌틴이 서류를 다 읽은 모양인지 내려놓는 소리가 나네요.
 
디안 밀리테:다 읽었어? (E북 리더기... 내려놓았다.)
 
플로렌틴 발렌틴:응. 조금 먼 남쪽 지역이지만 실제로 생존자를 구명하려 했던 민간단체가 있었대. 다만 몇 년 전의 기록이고 이미 그 장소를 떠났을 가능성이 커. 다음 목적지는 그 부근으로 잡아도 좋을 것 같아.
 
디안 밀리테:그런 단체가 있었구나... 몇 년 전의 기록이라니 우리도 구명을 기대하긴 힘들겠지만. (뭐.) 가보면 괜찮은 물자 약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난 좋아.
 
조사를 마쳤다면 이만 기록실을 벗어납니다. 방송실에서 더 둘러볼 만한 곳은 없습니다.
 
.
 
.
 
.
 
덜컹거리며 차체가 흔들립니다. 당신과 발렌틴을 태운 차량은 신호도, 다른 운전자도 존재하지 않는 도로를 막힘 없이 달립니다.
 
차창 밖으로 하얗게 덮인 세상이 스쳐 지나갑니다. 발렌틴의 말에 의하면 다행히 온종일 내리던 눈이 그쳤다는군요. 걷는 게 조금은 수월해지겠어요.
 
얼마 가지 않아 차의 시동이 꺼집니다.
 
을 열자 히터가 틀어져 있던 차 안과 달리 문이 열리자마자 차가운 한기가 몰아칩니다.
 
빗물도 얼려버릴 듯한 시린 겨울날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발렌틴은 다정하게 밀리테의 손을 잡습니다.
 
오늘이 며칠이었던가요?
 
이제 와 날짜니, 시간이니, 그저 아득한 개념으로만 느껴질 뿐입니다.
 
그저, 봄이 오면 이러한 추위도 한풀 꺾이기 마련이겠죠.
 
✎:씨앗을 구할 수 있다면 발렌틴과 한 자리에 정착해 텃밭을 가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발렌틴이 당신의 손을 잡고 함께 마트로 향합니다.
봄이든, 텃밭이든, 당장은 먼 미래의 일입니다. 일단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는 게 맞겠지요.
 
플로렌틴 발렌틴:딘, 나 추워...
 
내린지 얼마나 됐다고. 손은 아직 따스하지만 보란 듯 어리광입니다.
 
디안 밀리테:바람이 꽤 차네.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네 손 제 외투 주머니 속에 넣었다.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지게.) 봄이 오려면 멀었나...
 
발렌틴은 한층 더 산뜻하게 걷는 듯하네요. 이런 개수작을 받아주다니... 대단합니다.
 
당신은 마트로 걸어가는 사이 발밑에 자박자박 밟히는 유리 조각들을 느낍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들이 부서진 흔적이 즐비한 것 같습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마트」
 
✎:당신은 세상이 멸망하고 점차 아비규환이 되어가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커다란 마트는 식료품을 노리고 온 사람들로 들끓었겠지요. 누군가 잠긴 문을 부수고 침입했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어쩌면 식량 보급을 위해 난투극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발렌틴이 보고 있는 내부는 난장판이 따로 없겠네요.
 
플로렌틴 발렌틴:전기는 들어오지 않는 것 같네. 냉동식품은 있어도 전부 상했겠지?
 
냉동식품뿐만이 아닙니다. 입구를 부수고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의 식료품을 챙겨간 이후입니다.
 
당신과 발렌틴이 먹을만한 것이 아직까지 남아있을까요?
 
디안 밀리테:운 좋게 캔이라도 찾길 빌어야겠네... 마트는 어때, 많이 처참해?
 
발렌틴은 주변을 둘러보는 듯 잠시 말이 없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내부가 상당히 손상되어 있어. 다수의 인원이 난투라도 벌인 것처럼.
진열장은 전부 부서지고 쓰러져 있고 물건이 바닥에 쏟아져 있는데, 쓸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가장 큰 저 진열장부터 치워야 할 것 같은데. 이것 좀 잡아볼래?
 
발렌틴은 당신의 손을 끌어 딱딱한 무언가의 모서리를 쥐여줍니다
 
손으로 만져보면 무게가 상당히 나가 보입니다. 이 커다란 것이 쓰러졌다면 한 명이 들어 올리기는 무리겠지요. 어쩌면 밑에 필요한 무언가가 깔려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디안 밀리테:응. 들어 올리면 돼? (열심히 힘 줘 보기...)
 
디안 밀리테:
근력
기준치: 50/25/10
굴림: 54
판정결과: 실패
 
당신은 발렌틴의 신호에 맞춰 힘을 줍니다. 어떻게든 조금씩 움직이던 진열장은 무언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더는 밀어지지 않습니다.
 
쿵, 얼마 지나지 않아 놓쳐버린 진열장이 바닥을 크게 울립니다.
 
그 충격에 툭, 투둑, 머리 위에 돌가루가 떨어져 내립니다.
 
어딘가에 쌓여있던 먼지를 잔뜩 집어삼킨 것 같아요. 콜록거리는 기침이 절로 터집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딘, 괜찮아? (아오... 콜록콜록.)
 
디안 밀리테:(잔뜩 쿨럭쿨럭...) 응... 아마.
 
디안 밀리테:
기준치: 50/25/10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
 
어렵사리 무거운 진열장을 옮긴 보람이 있었습니다. 당신의 손에 통조림과 인스턴트 식품 같아 보이는 것이 잡힙니다.
 
물건을 뒤적거리다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렌틴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남은 잔해는 대충 좀 치울 테니 잠시 이쪽에서 필요한 것이라도 찾아보고 있으라고요.
 
디안 밀리테:(쿨럭...) 고생한 보람이 있네. (먼지 탈탈 털고 넣음... 제대로 털어졌을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먹을 게 더 없으려나... (조심조심 찾아본다.)
 
이윽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정리하는 데 마트 안이 상당히 난잡한 모양입니다.
 
디안 밀리테: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97
판정결과: 실패
 
아쉽게도 딱히 쓸만한 건 보이지 않네요.
 
문득 당신의 머리 위로 툭, 투둑, 작고 딱딱한 무언가가 조금씩 떨어져 내립니다.
 
손을 뻗어 만져보면 무언가의 파편이나 부스러기 같습니다.
 
디안 밀리테: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81
판정결과: 실패
 
당신이 고개를 들어 올리면 당신의 뺨에 자잘한 돌가루가 떨어져 내립니다.
 
…위에 무언가가 있는 걸까요?
 
끼이익, 어디선가 낡은 철판이 휘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
 
…그 소리가 어쩐지 막연한 공포를 유발하는 것도 같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딘?
 
쿵, 당신은 먼 곳에서 발렌틴이 무언가를 놓치는 듯한 소리를 듣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피해!
 
당신은 격양된 목소리를 듣습니다. 아, 익숙한 소음입니다.
 
✎:눈 앞을 가린 캄캄한 어둠 가운데, 당신은 막연히 그 소음이 낯설지 않다고 느낍니다.
거대한 건물이 무너져내리는 소리. 사람들이 깔리고, 다치고, 묵직한 건물의 파편에 짓눌려 죽어가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옵니다.
머리 위에서 생긴 균열은 삽시간에 날카로운 아가리를 벌립니다.
 
빠드득, 빠각, 당신은 보지 않아도 그 생경한 공포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 무너져내리는 것들 와중, 당신은 당신에게 다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를 듣습니다. 당장 거기서 비키라는 목소리와 함께요.
 
생각할 시간은 없습니다.
 
디안 밀리테:
민첩
기준치: 50/25/10
굴림: 37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당신이 어둠 속에서 무작정 몸을 피하면, 당신이 조금 전까지 서 있던 위치에서 둔탁한 소음이 쿵, 바닥을 울립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파편이 부서지고 추락하는 소음이 연신 울려 퍼집니다.
 
✎:당신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음성이 스쳐 지나갑니다.
 
당신을 애타게 찾는 익숙한 음성이요.
 
✎:절박하게, 간절하게, 그리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옵니다. 어쩐지 세상이 다시금 시뻘건 핏빛으로 물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순간, 누군가 와락 당신을 거칠게 품에 끌어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몸을 감싼 이의 주변으로 망가진 것들이 몇 번이고 추락하고 부서집니다.
 
이윽고 파스스.. 자잘한 조각들마저 바닥으로 추락하고 나면, 건물의 붕괴가 잠시 멈춘 듯 주변에 소름 끼치는 적막이 찾아옵니다.
 
발렌틴은 여태 당신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다가, 그제야 천천히 팔에서 힘을 풀어냅니다.
 
디안 밀리테:
SAN Roll
기준치: 47/23/9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2
 
플로렌틴 발렌틴:딘, 디안... 괜찮아?
 
디안 밀리테:로, 로렌, 나, 나... (손에 잡히는 뭐든 일단 잡고 보았다. 아마 네 팔인 것 같았고.) 나... 나는, 괜찮아. 응, 괜찮아... 그 날이 아니야. 살아있어. (중얼거렸다.) ...로렌, 너는? 어디 안 다쳤어?
 
플로렌틴 발렌틴:(다시금 세게 껴안는다. 고개를 푹 파묻고 웅얼거렸다.) 멀쩡해. 나는 네가... (...) 네가 사라지는 줄 알았어. 또. 내가 어떻게 널 내 곁에 뒀는데... (다시 잃을 수는 없어, 딘. 힘 푼다.) 정말 다행이야. 조심하자, 우리. (부디.)
 
디안 밀리테:('내가 어떻게 널 내 곁에 뒀는데'? 이상한 문장이라 생각했다. 우린 항상 같이 있었고, 그걸 막는 사람들은 없었는데.) ...응, 먼저 사라지지 않아. 변치 않을 맹세를 했잖아, 우리... (더듬거려 네 손을 잡았다.)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너가 다쳐버리기라도 하면, 난... 지금 무엇도 해줄 수 없는데.)
 
플로렌틴 발렌틴:(시야를 내리고 입술을 깨문다. 보이지 않겠지만.) 나를 믿어. 완벽하게 괜찮으니까. 어서 여기를 나가자. (맹세를 했다지만 나는 불안해, 딘. 늘 그래왔듯 불안해. 세상은 맹세를 지켜주지 않으니까.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것도 있는 거야. 나는 이제 그걸 알아. 숨을 고르고 마른세수했다.) 그만 나가자. 여기에 더 있다간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곧바로 일어나 네 손 이끌지만 떨림이 그대로 느껴졌다. 평소보다 더한 불안이 명백해서.)
 
디안 밀리테:(내가 변치 않을 맹세를 믿게 된 건 오롯이 네 말 덕분인데도. 불안하다는 네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눈 감는 동안, 네가 본 세상은 대체 어떤 것이길래... 네 얼굴 하나 보고 싶었다. 허락되진 않겠지만.) ...그래. 가자. (잘게 떨리는 네 손 힘주어 잡았다. 네 거대한 불안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지만, 그게 너무 범람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당신과 발렌틴은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 건물에서 벗어납니다.
 
어쩐지 발렌틴이 한쪽 다리를 저는 것도 같았는데, 착각이었을까요?
 
당신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당신은 멀지 않은 곳에서 낯선 인기척을 느낍니다.
 
엘렌 제이:갑자기 난데없이 뭐가 무너지나 해서 와봤더니…
 
상당히 걸걸한 투의, 중년 즈음 되어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입니다. 당신이 여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듯 낯선 음성입니다.
 
생존자입니다. 목소리만 들어선 확신할 수 없으나, 적어도 그 끔찍한 질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의 음성은 아닙니다.
 
여성은 각 잡힌 발소리와 함께 가까이 다가오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우뚝 멈추어 섭니다.
 
엘렌 제이:대체 너희들 안에서 뭘 한 거야? 그리고 그것보다 너 그 붕대…
 
플로렌틴 발렌틴:...사고가 있었어요. 감염된 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이 뭐라 답하기 전 발렌틴이 당신의 한쪽 허리를 감싸 안으며 대신 답합니다.
 
아직 생존자가 꽤 많았을 시절 얼굴의 붕대 탓에 종종 감염자로 오해를 사곤 했었죠.
 
지금이야 감염자와의 거리가 아무 상관 없다는 게 밝혀진 이후지만, 아직까지 역병 환자라 하면 기피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다행히도 눈앞의 인물은 그런 부류는 아닌 것 같네요.
 
엘렌 제이:(...) 이쪽은 엘렌 제이. 편하게 엘렌이라 불러. 그나저나 이 근처에서 못 보던 얼굴인데.
 
디안 밀리테:엘렌 씨로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디안, 디안 밀리테... 그쪽도 편하게 디안이라 불러요.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 돌리고... 이쪽이 맞나?) ...좀 멀리서 왔어요. 생존자들을 찾으려고.
 
플로렌틴 발렌틴:플로렌틴 발렌틴입니다. 이 근방 도로를 따라 오늘 막 도착한 참이에요. 못 보던 얼굴이라 하면 혹시 근처에 다른 생존자들이 있는 건가요?
 
엘렌 제이:살아있는 사람을 말하는 거라면 있지. 방금도 그곳에서 나오던 길이니까. 참, 멀리서도 왔나 보군.
 
플로렌틴 발렌틴:쉘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 혹시 그곳에 잠시 머물러도 될까요? (네게 속삭인다.) 괜찮을 것 같지. 아무래도?
 
디안 밀리테:응, 오히려 좋지. 쉘터를 계속 찾아다녔으니까... 잘 됐다. (옅게 웃음기 깔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렌 제이:(인상 쓴다.) 내가 너희의 무엇을 믿고?
 
플로렌틴 발렌틴:(...) (그러네?) (디안 부담스럽게 봄... 안 보여도 보일 정도로.)
 
디안 밀리테:(이런...)
설득
기준치: 40/20/8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보다시피 저흰 감염되지도 않고, 약간이지만 물자도 있어요. 잠시 머무르는 것도 안 될까요? (...)
 
엘렌 제이:하긴 모양새만 봐도 다 죽어갈 것 같은 몰골이니... 좋아. 다만 그곳엔 어린아이도 있어. 험한 일 당하고 싶지 않으면 문제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플로렌틴 발렌틴:(휴...) 그럼요.
 
디안 밀리테:(다행...) 당연하죠.
 
엘렌은 앞장서는 듯 발걸음을 돌립니다. 몸을 돌리는 순간 철컥, 하는 묵직한 금속음을 들은 것도 같습니다.
 
발렌틴은 당신의 손을 잡고 걸음을 이끌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직업 군인 같아. 어깨에 총기를 메고 있고, 조금 변형된 듯한 군복을 입고 있어. 얼핏 보아 중령 정도 되어 보이는데, 행동거지만 보면 아직까지 군대에 소속되어 있는 건 아닌 것 같네.
 
발렌틴은 당신 대신 엘렌이라는 사람에 대해 나직한 음성으로 읊습니다.
 
짧게 숏컷으로 친 머리는 희끗희끗한 회색이며, 육안으로 보아 쉰은 넘은 듯한 모양입니다.
 
전반적으로 노련한 맹수 같아 보이는 여성입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어떨 것 같아. 괜찮겠지? 우리.
 
디안 밀리테:군인들이 만든 쉘터이려나? (정부가 제 기능을 멈춘지는 꽤 되었다만. 음. 잠시 생각하고) ...괜찮겠지. 어린 아이도 있다는 건 그들이 꽤 인간성을 갖추고, 아이도 돌볼 만큼 충분한 물자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음... 나 버리고 너라도 도망쳐서 살아. (농담 슬...)
 
플로렌틴 발렌틴:(노려봄... 노려봄... 노려봄...) 디안 세레니티 밀리테... (농담인 걸 알면서도.) 그럴까? 혼자 어디 물 좋은 곳에 가서 좋은 사람 만나고... (토라짐... 뭐 이런 게 다 있어?)
 
디안 밀리테:네가 그래서 더 행복해진다면 내가 어떻게 널 붙잡고 있겠어. (그러나. 잡은 손 미약하게 끌면서.) ...그래도 네 좋은 사람은 내가 되고 싶은데. (욕심이겠지만.) 알지? 내가 너 사랑하는 거... (너무 삐지지 마.)
 
플로렌틴 발렌틴:(일부러 한참 걷기만 하다가. 바보 딘. 못 이기는 척 더 가까이서 걷는다.) 그래, 사랑해. 별개로 넌 바보야...
 
얼마나 걸었을까요, 문득 발렌틴의 고개가 위로 들립니다.
 
...
 
플로렌틴 발렌틴:여긴… 대학교가 아닌가요?
 
엘렌 제이:그래. 우리들의 임시 쉘터지.
 
대학교?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 엘렌은 들어오라는 짧은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멀어집니다.
 
그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당신과 발렌틴은 단단히 손을 맞잡습니다.
 
몇 년 만에 보는 비감염자, 생존자들이 아직 이 세상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만 느껴집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쉘터를 발견한 탓일까요, 당신의 손을 감싸 쥐어 이끄는 발렌틴의 어조도 미미하게 고조된 것을 느낍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들어가자, 멍청이. (이럼...)
 
디안 밀리테:암요, 천재 발렌틴 씨의 본부대로. (웃음...)
 
당신과 발렌틴은 손을 맞잡은 채 천천히 대학교 안으로 향합니다.
 
「대학교」
 
케이 베르타:이 시계도 언니 거에요?
와아, 나 시계 볼 수 있어요! 어디 보자, 음.. 두 시…
 
앤 밀러:케이, 지금은 이미 여섯 시가 넘었잖니
 
꺄르륵 거리며 웃고 떠드는 목소리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쩐지 그 소음이 싫지만은 않습니다. 이렇게 타인의 웃음소리를 듣는 게 몇 년 만이었던가요?
 
케이 베르타:아냐, 언니, 이거 두 시 맞죠? 맞다니까?
 
플로렌틴 발렌틴:그래.. 두 시네. 손목시계가 고장 난 모양이야.
 
케이 베르타:왜요? 고장 난 시계를 왜 차고 있어요?
 
『케이 베르타』 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낯선 사람에 대한 흥미를 불태우며 한시도 발렌틴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어쩐지 발렌틴의 목소리가 조금 피곤해 보이네요.
 
발렌틴은 왜 고장난 시계를 여지껏 차고 있는 걸까요. 좀 의아하긴 하지만.
 
당신과 발렌틴은 현재 기숙사실로 보이는 대학교의 부속 건물 로비입니다.
 
약 삼 년 전 엘렌이 배우자와 남동생을 포함한 몇몇 생존자와 함께 정착한 이후 지금껏 쉘터로 삼은 장소입니다.
 
아직 수도와 가스가 끊기지 않은 건 운이 좋았네요.
 
✎:한때 열 여섯 명가량 되었다던 무리는 역병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어 지금은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케이는 역병으로 부모를 모두 잃었고, 함께 쉘터에 왔다던 엘렌의 배우자도 보이지 않네요.
잠시 정찰을 나갔다는 엘렌의 남동생을 제외하면 현재 기숙사에 있는 사람은 당신과 발렌틴, 엘렌과 케이, 그리고 중년 여성 『앤 밀러』와 아직 만나보지 못한 그녀의 딸, 이렇게 총 여섯명 뿐입니다.
여태 당번을 정해 생필품을 보급해 왔지만 아무래도 근방의 식자재는 전부 바닥난 모양입니다.
조만간 쉘터를 정리하고 미리 보아둔 장소로 이주하려던 찰나 당신과 발렌틴을 마주치게 된 겁니다.
 
앤 밀러:...그래서, 그때 엘렌이 죽을 뻔한 나를 구해준 거예요. 그 뒤로 이곳에 합류해 있죠.
 
지금 당신의 옆에 앉아 푸근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사람은 앤 밀러입니다.
 
그녀는 재작년 즈음 식량을 노리고 습격한 강도에게 남편을 잃고, 이후 엘렌에게 발견되어 쉘터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함께 들어온 스물한 살의 딸은 몸이 좋지 않아 방에서 잘 나오지 못한다고 하네요.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외부인일 뿐인 당신에게 친절하게 이곳의 사정을 말해준 사람 또한 그녀입니다.
 
디안 밀리테:그런 일이... 힘드셨겠어요. (고개 주억거리다가) ...근데 이렇게 다 말해주셔도 되나요? 저희는 그저 잠시 머물다 갈 외부인일 뿐인데...
 
앤 밀러:나는 서로 어려울 때 더욱 돕고 살아야 한다고 봐요. 몇 년 만에 새로운 사람이 오니 케이도 좋아하는 것 같고요. 또, 혼자가 될 때 사람은 쉽게 외로워지잖아요. 밀리테와 발렌틴만 괜찮다면 여기 계속 머물지 않을래요? 사정을 대강 엘렌에게 전해들었거든요.
 
디안 밀리테:혼자면... 그렇죠. 외로운 건 막을 수 없더라고요. 혼자 서 있을 때. (잠시 놀란 낯.) 계속...요? 그런... 그럴 수만 있으면 엄청 좋죠. 나중에 로렌에게 물어볼게요. 제일 중요한 건 로렌 의견이라... (슬 웃고.) 그나저나... 치료제 개발 소식 같은 건, 들어보셨나요?
 
앤 밀러:(잠시 안쓰럽단 듯 바라본다. 어조에서도 묻어났다. 눈 부상에 대한 건 아닌 듯한데... 이상하게.) 치료제요? (그러고 보니...) 잘 모르겠네요. 언론에서도 자세히는 들은 적 없어요. 무슨 인체실험으로, 뭘 한다던데. 그런 건 질색이에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니. 정말 기이하지 않나요?
 
디안 밀리테:(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잠시간의 침묵이라고만 느꼈을 뿐...) 대부분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니까요. 저는 남한테 희생을 강요하진 못하지만, 강요하는 사람들의 생각도 이해해요. (그 강요의 대상이 저 자신이 된다고 해도.) 그렇게라도 살고 싶은 게 인간임을 알고 있으니까... (간극. 곧 쾌활한 투로.) 이 쉘터를 떠나 이동하려던 곳은 어디었어요?
 
앤 밀러:(신중하게 고개 끄덕인다.) 근방에서 조달할 수 있는 생필품이나 음식은 거의 바닥났다 하더라고요. 이주 내로 남쪽으로 떠날 생각이에요. 같이 갔으면 하네요. 두 사람만 좋다면 우리는 언제나 환영이에요.
 
한창 앤과 대화를 하던 와중 얼핏 발렌틴 쪽에 귀를 기울이면 아직도 케이의 질문 공세에 시달리는 발렌틴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쪽에 신경 쓰고 있는 당신을 눈치챈 것인지, 앤이 인자한 음성으로 부드럽게 말을 겁니다.
 
앤 밀러:그러고 보니 아직 함께 온 일행과는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네요.
그러니까 두 사람은, 연인 사이인가요?
 
앤은 이후 고개를 절레 저으며 미안하다는 듯 말을 덧붙입니다.
 
앤 밀러: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주책이람. 미안해요, 소중히 여기는 게 눈에 보여서 그만.
이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거죠.
 
어쩐지 그 마지막 말의 울림이 묘하게 안타깝게 들립니다.
 
그러고 보니 앤은 불과 몇 년 전 강도에게 남편을 잃었다고 말했었지요. 어쩌면 그를 추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디안 밀리테:괜찮아요. 연인... 이라고 불러도 되려나요. (막상 고백 비스무리한 건 엉망진창인 약혼 반지 건네주기 밖에 없었는데.) 소중한 사람이죠, 무엇보다도. (질문 공세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 돌렸다가) 밀러 씨는 남편 분을 잃었다고 하셨죠. 유감이에요, 정말...
 
찰나의 침묵 끝에 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집니다. 다감하게 웃어보이네요.
 
앤 밀러:이만 저녁 식사라도 도우러 가야겠네요.
오랜 시간 걷느라 몸도 불편하고 피곤할 텐데, 편히 쉬고 있어요. 케이, 너도 손님 그만 괴롭히고.
 
앤이 다정하게 당신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자리를 벗어납니다.
 
그런 당신의 옆에 비로소 케이에게서 해방된 발렌틴이 피곤한 듯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습니다.
 
그가 앉은 쪽 어깨에 툭, 익숙한 무게감이 자리합니다.
 
플로렌틴 발렌틴:피곤하네… 날 버려두고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했어?
 
디안 밀리테:별 얘기는 아녔어. 케이랑 노는 건 어땠어? (작게 웃으며 물었다.)
 
플로렌틴 발렌틴:뭐어, 애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 생기 넘치더라고. 이 쉘터가... 좀 투박하지만 다정하고. 다들 좋은 사람 같아. 너는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거리가 가까워지자 얼핏 희미한 혈향을 맡습니다.
 
디안 밀리테:아, 마침 밀러 씨가 계속 머무는 건 어떻냐고 물어보시더라고. 너만 좋다면 나는 당연히 좋다고 말했는데... (그 순간, 희미한 혈향 맡고) 잠깐, 로렌. 피 냄새... 어디 다쳤어?
 
플로렌틴 발렌틴:난 네가 좋으면 좋아. (여기 정착하는 게 좋겠다. 기대어 나른한 투로 말하다 이어 자연스레 고개 들고 떨어진다.) 다치진 않았는데. 왜, 피 냄새 나? (흠...) 아까 조사하면서 시체를 봤는데, 좀 뒤지느라 스몄나 보네. 신경쓰지 마. 넌 날 믿잖아. 그렇지?
 
디안 밀리테:(심리학!!!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디안 밀리테: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플로렌틴의 말에는 그닥 기시감이 없습니다.
 
디안 밀리테:응, 아까는 몰랐는데 가까이 있으니까 느껴져서... 마트에서 다친 줄 알았잖아. (품 안에 널 안았다.) 아프지 마, 다치지 말고. 전 같았으면 널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너무 무력해서. 고작 시력 하나 없어진 것 만으로 할 수 없어진 게 너무 많아서.) ...널 믿어. 언제나.
 
플로렌틴 발렌틴:응, 사랑해, 딘.
 
그 순간, 어디선가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투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옵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발소리 이후 벌컥, 어딘가의 문이 열리고, 그와 동시에 후욱 바깥의 찬 공기가 실내에 가득 파고듭니다.
 
브랜 가이에스:어디 보자, 새로운 식구가 생겼다고?
 
때론 음성만으로도 상대의 인상을 가늠할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보지 않아도 강렬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거구의 체격이 느껴지는 듯 합니다.
 
그는 큰 보폭으로 당신에게 다가오며 다소 성급한 인사를 건넵니다.
 
브랜 가이에스: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낯선 사람이군 그래! 브랜 가이에스라고 하네.
 
플로렌틴 발렌틴:이쪽은 플로렌틴 발렌틴이에요.
 
디안 밀리테:안녕하세요. 디안 밀리테라 합니다.
 
겨울날의 찬 기운을 담뿍 머금은 인물은 당장이라도 호탕하게 당신과 격한 포옹이라도 나눌 것처럼 다가왔으나…
 
어째선지 그 이후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뚝 멈춘 발걸음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끊겨 있습니다.
 
이윽고 당신의 지척에서 멈춰있던 숨소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립니다.
 
브랜 가이에스:...당신 뭐야.
당신… 너, 네가 뭔데 그걸 하고 있어.
 
마치 단단히 이를 악문 듯한 낮은 목소리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그의 주변을 감싼 공기가 삽시간에 위협적으로 바뀝니다.
 
퍽, 거세게 당신의 멱살을 잡아챈 손아귀가 억세게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을 표출합니다.
 
주변에서 발렌틴이나 다른 사람들이 급하게 제지하는 소리가 들려오나, 그의 신경은 오로지 당신에게만 집중된 듯합니다.
 
갑갑하게 당신의 숨통을 끌어당긴 그의 손길이 당신의 목을 감싼 것을 움켜쥡니다.
 
브랜 가이에스:이거… 어디서 났어. 이 목도리.
내가 린에게 직접 선물한 건데. 너.. 아니, 당신. 린을 만난 건가?
 
그의 우악스러운 손을 붙잡으면 왼손 약지에 걸린 두툼한 반지가 느껴집니다.
 
손끝에 눌리는 촉감으로 보아 결혼반지로 보입니다. 린이라니, 결혼한 배우자라도 찾고 있는 건가요?
 
디안 밀리테:
설득
기준치: 40/20/8
굴림: 11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쿨럭.) ...린, 이라니.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목도리도... (잠시 고민. 여기서 로렌에게 선물 받았다고 말하면 곤란해지는 건 로렌이겠지.) ...주웠고요.
 
브랜은 다소 격정적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으나, 더는 당신에게 달려들 것처럼 굴지 않습니다.
 
그저 형편없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재차 같은 말을 던질 뿐입니다.
 
당신에게 향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불안과, 공포와, 실낱같은 희망이 혼탁하게 뒤섞여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음성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듯 누군가의 이름을 간절히 찾습니다.
 
✎:린. 그런 이름은 들어본 기억조차 없습니다.
그보다, 목도리라고 했던가요? 분명히 이 목도리를 건네준 사람은 발렌틴이었을 텐데요.
 
플로렌틴 발렌틴:이게 무슨 짓인가요. 진정하고 놓으세요!
 
발렌틴이 당신과 브랜의 사이를 가로막듯 거리를 벌립니다.
 
그러나 당신의 귓가에는 여전히 그의 형편없이 흔들리는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그는 당신의 멱살을 놓쳤음에도 몇 번이고 헛손질하며 당신을 붙잡습니다. 뭉툭한 손톱이 할퀴고 간 자리에 아릿한 통증이 파고듭니다.
 
순간, 발렌틴이 딱딱한 어조로 입을 엽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찾고 있는 사람이 테가 둥근 안경을 쓴 여성 맞나요? 체격이 작고, 붉은색이 도는 머리카락의.
 
브랜 가이에스:...! 맞아. 린을 만났나 보구나. 지금 어디에 있지? 언제 즈음 그녀를…
 
플로렌틴 발렌틴:그의 시신을 봤어요. 이 목도리는 그에게 마지막 보답으로 받은 거고요. 진통제를 드렸거든요.
 
브랜 가이에스:...뭐?
 
발렌틴은 낮은 목소리로 린이라 불린 사람의 부고를 전합니다.
 
이곳에서 북쪽, 그러니까 당신과 발렌틴이 차를 타고 왔던 그 방향에서 시신을 발견했다고요.
 
아니, 정확히 하자면 시신이 아니라 곧 시신이 될 사람이었지만.
 
거처를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수색을 할 때 즈음 발견했던 것일까요. 고인의 목도리라니.
 
그러나 이 멸망한 세상에서 이런 것으로 힐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필요한 것이라면 썩어가는 시체의 품을 뒤져서라도 가져가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니 말입니다.
 
덕분에 눈밭을 걸어오는 길이 썩 포근하지 않았던가요.
 
다만 발렌틴의 음성 끝으로 고요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습니다.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은 누가 테이프를 길게 잡아끄는 것처럼 숨 막히는 정적과 함께 천천히 흘러갑니다.
 
브랜 가이에스:그럴 리가.. 안 돼. 아, 안 돼…
분명 그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잘 살아남아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었는데.
 
천천히 그의 목소리에 울음이 번집니다. 억지로 억누르고 참아보려는 듯 목이 막힌 소리를 내다가도 이내 떨리는 숨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삽시간에 차갑게 가라앉습니다.
 
적막 가운데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호탕하게 인사를 건네던 남자의 흐느낌만이 간간이 흘러나옵니다.
 
누가 이 순간 감히 저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요?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하나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가족을 잃고, 친구도, 지인도, 그 누구도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혹자는 눈앞에서 고통스레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를 바라만 보아야 했고, 혹자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헛된 희망이라도 붙들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숙연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그저 침묵하고 있자면, 어느새 다가온 앤이 당신과 발렌틴의 어깨에 손을 짚고 조심스레 두 사람을 이끕니다.
 
앤 밀러:갑자기 미안해요. 끔찍하게 아끼던 사람이라… 둘의 사이가 각별했다 들었거든요.
그래도 강인한 사람이니 막연하게나마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죠.
...이런 세상에, 헛된 희망이었던 거지만.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방을 내어줄 테니 이만 들어가서 쉬어요.
 
당신이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나면, 누군가의 눅눅하게 젖은 숨소리도 등 뒤로 천천히 멀어집니다.
 
...
 
앤은 기나긴 복도를 따라 당신과 발렌틴을 묵묵히 안내합니다.
 
복도를 걷는 와중 발렌틴은 당신의 손을 말없이 그러쥡니다.
 
얼마나 그렇게 걸었을까요. 앤은 기숙사의 빈 호실 문을 열어주고 당신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입니다.
 
앤 밀러:남은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해요.
편안한 밤 되길.
 
디안 밀리테:...네, 밀러 씨도 좋은 밤 되세요.
 
.
 
.
 
.
 
당신은 잿빛으로 가득한 복도 위에 서 있습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생생하게 보이는 주변의 풍경이 유난히 이질적인 감각을 자아냅니다.
 
오늘이 며칠이었죠? 지금은 몇 시인가요
 
발렌틴은 어디에 가고, 당신은 왜 이 자리에 혼자 서있죠?
 
✎:문득 세상이 이지러집니다.
작은 파편으로 부서져 내리는 것들이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누릅니다. 어느 순간 당신의 시야에 검은 암막이 드리워집니다.
마치 단단한 무언가에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굳어버린 손발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귓가에 누군가의 낯선 음성이 들려옵니다.
환하게 켜지는 불빛. 코끝을 스치는 혈향.
 
✎:살갗에 닿는 고무의 느낌이 기이한 불쾌감을 조성합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요? 그 모든 감각이 그리 낯설지 않았던 것은…
 
디안 밀리테: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1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당신은 아득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드르륵드르륵, 작은 바퀴가 굴러가며 내뱉는 아우성. 달칵, 금속과 금속이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소리.
 
작은 바늘이 수없이 살갗을 찌르고, 헤집고, 파내는 듯한 끔찍한 감각.
 
단단한 구속,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
 
“반응이 있군. 한 번 더.”
 
✎:누구의 음성이었죠, 그건?
모르겠습니다. 더는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아요.
그저 벗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어요.
 
...
 
흠칫, 정신을 차려보면, 아득한 현기증과 함께 새로운 아침을 맞이합니다.
 
간밤의 사고에 놀란 근육이 뻐근하게 당겨오는 것도 같습니다.
 
어쩌면 오랜 시간 걷고 수색해온 몸이 뒤늦게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렌틴은 아직 잠들어 있는 건가요? 당신이 일어나는 기척에도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발렌틴이 누워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으면…
 
……잘게 떨고 있는 발렌틴의 손이 느껴집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딘.
 
지독하게 가라앉은 숨소리입니다. 마치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잠긴 음성이 들려옵니다.
 
디안 밀리테:로렌, 왜...
 
플로렌틴 발렌틴:미안해. 몸이 조금 좋지 않아서... 배낭에 감기약이 있을 거야. 문 옆에 있는 배낭을 좀 가져다 줄래?
 
디안 밀리테:괜찮다면서. 거짓말한 거야? (인상 찡그렸다. 비척 일어나 배낭 집으려 했고...)
 
플로렌틴 발렌틴:아니, 그건 아니고. 다친 곳은 없는데 피곤했나 봐. 정말이야.
 
당신이 배낭을 찾아 발렌틴에게 건네면, 발렌틴은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앉은 뒤 배낭 안에서 약을 찾아 삼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건지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디안 밀리테:(내가, 내가 조금만 볼 수 있었다면...) ...여기가 쉘터라 다행이네. 열은 안 나지? (얼굴 근처... 쓸어보려했다.)
 
얼굴을 만져본다면 미약한 열감을 느낍니다.
 
발렌틴은 담담한 목소리로 당신을 안심시킵니다. 오늘 하루 정도 푹 쉬고 나면 나을 수준이라고요.
 
플로렌틴 발렌틴:나갔다 와. 아마 지금이 아침식사 시간일 테니까... 나는 조금 더 쉬고 있을게.
 
디안 밀리테:(네 머리 쓸어 넘겼다.) 응. 네 식사는 내가 챙겨올게. 그리고... 무리하지 마. 더 쉬어야 되면 내가 사람들한테 양해라도 구할 테니까...
 
당신이 방을 나서면 익숙하지 않은 지형이 다소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조금 헤매다 보면, 머지않아 반가운 목소리가 당신을 맞이합니다.
 
앤 밀러:좋은 아침이에요, 밀리테.
발렌틴은 어쩌고 여기에 혼자 있어요?
 
디안 밀리테:아, 로렌은 아프다길래 방에서 쉬라고 했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밀러 씨.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앤은 금세 당신과 함께 발렌틴의 상태를 걱정합니다.
 
그녀는 곧바로 발렌틴을 위해 소화가 잘되는 수프를 끓여주겠다고 말합니다.
 
마침 딸을 간호하며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차를 우리고 있었으니 수프와 함께 마시는 것도 좋겠다 권하면서요.
 
발렌틴을 위해 선뜻 나서주는 모양새를 보아 앤은 아픈 사람을 간병하는 것에 익숙해 보입니다.
 
앤 밀러:걱정 말아요. 금방 나아질 거예요.
 
디안 밀리테:고마워요... 그러길 바라지만, 원체 몸이 약했어서 걱정이네요. 밀러 씨가 도와주셔서 다행이에요...
 
수프와 차가 준비되려면 삼십 분은 걸릴 것 같네요. 그 시간 동안 근처 지형을 익히나요, 돌아가나요?
 
디안 밀리테:(로렌이 걱정되긴 하지만... 일단 이곳에서도 머물러야하니. 돌아 다녀본다.)
 
.
 
.
 
.
 
그러니까, 지금 어디쯤 온 거죠?
 
아직 지형이 익숙하지 않은 당신은 머지않아 길을 헤매게 됩니다.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코끝에 은은하게 알코올 향이 스쳐 지나갑니다.
 
당신이 복도의 코너를 도는 순간, 툭, 비틀거리는 누군가와 몸이 살짝 부딪힙니다.
 
브랜 가이에스:...아, 너는.
그… 잠깐 시간 괜찮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가까이에 선 브랜의 몸에서 독한 알코올 냄새가 풍깁니다.
 
밤새 술을 마시며 울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목소리는 어제와 달리 지나치게 잠겨 있습니다.
 
당신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눈치네요. 어떻게 할까요?
 
디안 밀리테:(술 냄새...) ...네, 괜찮아요. 어제와 같은 무례만 아니라면.
 
브랜은 머쓱한 태도로 적당히 앉을 수 있는 장소로 밀리테를 데려갑니다.
 
브랜 가이에스:시간 내줘서 고맙군. 사실 별건 아니고, 어제 일에 대해 사과하고 싶어서.
 
디안 밀리테:음... 그건 그렇게 오해했을 수도 있으니까, 괜찮아요. 저도 가이에스 씨 입장이었으면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브랜 가이에스:변명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린을 보지 못한지 정말 오래됐어. 또, 세상이 이렇게 되고 워낙 흉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으니까. (술병을 기울여 목을 축인다) 오해해서 미안하군.
 
디안 밀리테:사과하셨으니 괜찮아요.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면 그럴 수 있죠... 많이 아끼셨나봐요, 린 씨. 어쩌다 헤어지게 된 거예요? (묻는 게 무례가 아니라면.)
 
브랜 가이에스:(고맙단 듯 미소짓는다. 보이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사고가 있었어. 대피하다가 인파가 너무 몰려서 그만. (목소리에 눅눅한 물기가 번진다) 그때 그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디안 밀리테:아. 유감이네요... 그 일은. (짧게 침묵.) ...그, 군인 분의 남동생이신 건가요? (이름이 엘렌... 씨였나.)
(누가 ...머릿속으로 사고에 대해 물어보라 한 기분!!) 그리고 혹시, 그 사고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브랜 가이에스:(작게 웃는다.) 그건 아니지만... 소중한 사람들이지, 다들. 무슨 폭발 사고였겠지 아마. 무슨 제약 회사 소속 연구실 같았어.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군그래. 멀쩡하던 건물이 무너져내렸으니 우린 전쟁이라도 시작되는 줄 알았어. 린을 놓친 자리에 뒤늦게 되돌아갔지만, 몇 날 며칠을 기다려도 린은 돌아오지 않았지. …어쩌면 그때부터 그녀가 죽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야 했는지 몰라.
 
디안 밀리테:무너져, 내렸다고요? (침묵.) 혹시 잿빛 건물이었다던가. ...아니에요. 무엇보다... 유감입니다, 진짜로, 린 씨 일은...
 
브랜 가이에스:고맙네. 당신 곁에 있는 사람... 부디 잘 보살피기를 바라.
 
디안 밀리테:네. 놓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죠. ...말씀 고맙습니다.
 
이후 브랜은 발렌틴에게 가야 할 텐데 오래 붙잡아 두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벗어납니다.
 
걷는 걸음마다 꿀꺽, 꿀꺽, 독한 술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밀리테를 스쳐 지나가려는 찰나, 브랜은 밀리테의 어깨를 두드리며 애도에 잠긴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합니다.
 
브랜 가이에스:소중한 사람이 아픈 건 언제나 보기 힘든 법이니까...
 
.
 
.
 
.
 
앤이 건네준 수프에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올라옵니다.
 
방에 들어가면, 발렌틴은 잠꼬대라도 하는 것인지 반쯤 뭉개지는 발음으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안 돼.. 한 번만, 더….
 
...
 
발렌틴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면 밀리테의 인기척에 발렌틴이 눈을 뜨고, 갈라지는 음성으로 말을 겁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다녀왔어? 딘.
 
디안 밀리테:더 자지 그랬어. (네 손 찾아 잡았고) 수프야. 밀러 씨가 챙겨주셨어. (수프 건냈다.)
 
당신이 수프가 담긴 그릇을 건네는 사이 발렌틴은 허브 향이 나는 차를 잔에 따릅니다.
 
오랜 추위와 수색으로 몸이 고단한 건 당신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 함께 마시자고 하면서요.
 
플로렌틴 발렌틴:고마워, 수고했어. (웃는다.) 같이 마시자. 이리 와.
 
디안 밀리테:응. (이리 오라는 소리에 움찔, 포옹이라도 할 줄 알아서 그랬나...) 무슨 차야?
 
플로렌틴 발렌틴:허브 티야. 좀 쓸 수도 있겠다. (손에 잔 쥐여준다.)
 
디안 밀리테:평소에도 홍차를 즐겨 먹었는 걸.... (차 홀짝 마셨다.) ...음, 괜찮네.
 
부드러운 감자가 들어간 수프와 쌉싸름한 차를 마시면 몸이 홧홧하게 데워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간단한 재료로 만든 것 치곤 맛이 상당히 좋습니다.
 
...
 
식사를 마치고 발렌틴을 간호하는 사이 훌쩍 시간이 흘러갑니다.
 
당신에게는 낮도 밤도 하나같이 어둡기만 하니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가늠하기 어렵지만 말이에요.
 
당신의 간호를 받는 발렌틴의 숨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고르고 규칙적으로 들려옵니다.
 
수프와 약이 꽤 도움이 된 모양입니다.
 
✎:그런데, 벌써 밤이 깊어 오는 걸까요? 어쩐지 졸음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 같습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였다 일어나면 발렌틴의 상태가 호전되어 있을까요? 그래야 할 텐데 말이에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당신의 고개가 천천히 기울어집니다.
눈앞에 드리운 거대한 암전 너머로 조금씩 의식이 검게 물들어갑니다.
 
.
 
.
 
.
 
착각이었을까요?
 
분명 얼핏, 잠결에 누군가가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신음을 들은 것도 같았는데……
 
이어지려던 생각은 이내 밀려오는 수마에 흐릿하게 사라집니다.
 
똑똑, 잠든 정신을 깨우는 노크 소리가 들려옵니다.
 
엘렌 제이:밀리테, 발렌틴, 일어났나?
 
이 딱딱하게 각 잡힌 목소리는 엘렌입니다.
 
디안 밀리테:...엘렌 씨? 벌써 아침인가요.
 
당신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 발렌틴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직까지 잠들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처를 입은 몸은 휴식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호흡을 들어보면, 어제보다 현저히 안정적인 숨소리를 듣습니다.
 
만져보면 미열도 꽤 사라진 것 같네요. 그저 편안히 잠을 자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문을 열어주면, 당신은 엘렌이 어쩐지 어딘가를 한참 돌아다니다 온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몸에 붙어있는 눈밭의 찬 기운이 방안으로 조금씩 스며들어옵니다.
 
엘렌은 짤막한 아침 인사 이후 곧바로 본론을 꺼냅니다.
 
엘렌 제이:혹시 브랜을 봤나?
근방을 뒤져봤지만 보이지 않아서.
 
디안 밀리테:브랜... 가이에스 씨요? 아뇨, 어제 대화를 나눈 이후로는 전혀...
 
딱딱한 음성에 답지 않은 염려가 묻어납니다. 어제의 소식 이후 갑자기 실종되었다면 걱정할 법도 합니다.
 
✎:브랜은 원래도 종종 혼자 먼 곳까지 수색을 나갔다 오곤 했다지만,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어제 앤에게 듣기로는 오늘 유난히 폭설이 쏟아진다지 않았나요? 엘렌의 몸에서 전해지는 찬 기운으로 보아 벌써 바깥에는 눈이 쏟아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날씨에 외출이라니, 자살 행위나 다름없을 겁니다.
 
엘렌 제이:혹시 그 녀석을 보게 된다면 알려줘.
 
디안 밀리테:네. 별 일 없길...
 
✎:설마 허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반쯤 흘리듯 중얼거리는 음성과 함께 문이 닫힙니다.
 
엘렌이 방을 떠나면 공기 중에 남아있던 한기도 서서히 사그라듭니다.
 
브랜이 실종되었다니, 잠든 사이에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죠?
 
✎:당신은 마지막으로 그와 대화할 적 그에게서 느껴지던 짙은 공허감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의 어깨 위를 누르던 깊은 절망, 공포, 우울감. 마치 세상이 잿빛으로 빛바랜 것처럼 아무런 색채도 투영하지 못하던 죽은 시선들.
세상이 이렇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수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당신과 처음 대면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목소리에는 활력이 넘쳐 보였는데 말이에요. 당신과 발렌틴이 전해준 아내의 부고가 그의 실낱같던 희망조차 앗아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알 수 없는 기묘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어떻게 할까요, 밀리테? 원한다면 쉘터 내부를 둘러볼 수 있을 겁니다.
 
✎:발렌틴의 상태는 상당히 안정되어 보이니, 어쩌면 이대로 잠시 혼자 쉬게 두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앤을 보거든 어제의 수프와 차에 고마움을 표해야겠죠.
당신이 브랜의 수색을 도와준 것을 알게 된다면 당신과 발렌틴에 대한 쉘터 사람들의 호감이 증가할 겁니다. 당분간 함께 머물 생각이라면 걱정하는 시늉이라도 보이는 게 득이 될 겁니다.
 
물론 당신이 발렌틴의 옆에 남아 그를 간호한다고 하더라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디안 밀리테:로렌... (손 한 번 세게 쥐었다 놓고) 다녀 올게. ...아무래도 걱정 돼서. (하고 일어서 나간다.)
 
플로렌틴은 잠결에 잠시 디안을 잡지만, 이내 놓아줍니다.
 
✎:당신은 기억을 더듬으며 복도를 걸어갑니다.
몇 번 걸어보았다고 건물의 구조가 조금씩 머리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가면 양옆으로 기숙사 호실이 늘어서 있고, 그 끝에 문이 하나 있었지요.
그 문을 넘어가면 원통형의 둥근 공간이 나옵니다. 처음 당신과 발렌틴이 소파에 앉아 쉘터의 사람들과 대화했던 그 장소요. 앤이 수프를 끓여주었던 부엌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당신이 어느 방 앞을 지나가는 순간, 당신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주 가냘프고, 곧 끊길 것 같은 그런 미약한 숨소리입니다.
 
디안 밀리테: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당신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티아나 밀러:흐윽… 아파. 너무… 그만하고 싶어.
엄마… 너무 아파…
 
얼핏 듣기에도 브랜의 목소리는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젊고, 여린 여성의 목소리입니다.
 
디안 밀리테:(문 두드렸다.) 누구... 괜찮으세요?
 
문 밖에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답이 없습니다.
 
디안 밀리테:(속으로 사과하고... 문 열었다.) 괜찮으세요? 앓는 소리가 나서...
 
티아나 밀러:누, 누구세요..?
 
이윽고 부스럭부스럭 급하게 이불을 둘러쓰는 듯한 소리가 이어집니다.
 
티아나 밀러: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내 방이에요.
...나가, 나가주세요. 혼자 있고 싶어요.
 
디안 밀리테:죄송해요. 이름은 디안 밀리테고, 어제 쯤 새로 들어왔어요. (쫓겨나기 전에 우다다 말하기...) 도움, 도움을 주고 싶어서... 약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밀러 씨한테 부탁해서.
 
티아나 밀러:... (꾸욱, 이불 쥔다.) 됐어요. 어차피 쓸모 없는 낭비니까요. 울고 있던 건...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저,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이렇게 사는 것에 의미가 있는지, 저는 모르겠거든요. 어차피 나을 수 없는 병이잖아요, 이거.
.........저는 티아나.. 티아나 밀러에요. 혹시 우리 엄마, 앤 밀러를 만났나요?
 
디안 밀리테:그래도, 살아있다 보면 언젠가는... (말 멈췄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영양가 있는 말은 아니겠다 싶어서.) 아, 밀러 씨의 딸... 네. 덕분에 금방 여기 적응할 수 있었죠. 고마우신 분이에요.
 
티아나 밀러:...당신은 괜찮은 건가요? 그 눈….
 
디안 밀리테:...사고로 시력을 잃었어요. 뭐든 익숙해지면 괜찮아지죠. (거짓말이다.)
 
티아나 밀러:아, 감염된 상처가 아니군요. (흠칫 놀라며) ...미안해요. 나는 당연히 당신도 나와 같은 줄 알고… 비슷한 냄새가 났거든요.
 
디안 밀리테:냄새? (고개 기울였다.) ...무슨 말인진 잘 모르겠지만. 감염자는 아니에요. 그렇다면 여기서 받아주지도 않았겠죠.
 
티아나 밀러:그래도 받아줬을 거예요. 좋은 사람들이고, 전염되는 것도 아니니까... (이미 감염된 저처럼요. 눈 찌푸린다.) 비슷한 냄새... 이런 말 하면 실례겠지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버무린다.)
 
디안 밀리테:좋은 사람들인 건 알지만. (과연 외부인들한테까지 상냥했을까?) ...저한테 감염된 사람의 냄새가 나나요?
 
티아나 밀러:...그게... 무언가 썩는 냄새가... 미안해요. 이, 이만 혼자 있고 싶어요. 나가주세요.
 
머지않아 당신은 명백한 축객령과 함께 밖으로 쫓겨납니다.
 
절뚝거리는 걸음 소리와 함께 달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네요.
 
그녀는 사람과의 대화를 기피하는 듯싶습니다. 당신이 방에 들어간 순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었지요.
 
✎:저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은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무력한 결말을 맞이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치료제가 존재하지 않는 끔찍한 질병. 산채로 장기와 피부가 갉아 먹히는 통증이라니,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이미 이 세상은 숨을 구석 하나 없이 병마의 손길이 닿았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언젠가 당신이나 발렌틴도 감염이 되는 게 아닐까요? 문득 불안한 생각이 찾아듭니다.
 
이 광활한 땅에서 홀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 있나요, 밀리테?
 
디안 밀리테:(너 없는 삶도 생이라 이어갈 수는 있겠지만, 이상하게 예전같이 무던해지지가 않는다. 정말 이상하지, 내 삶은 언제나 연명과 같았고 병처럼 퍼진 불행이 인생을 바닥까지 쳐박아도 삶을 구걸했는데. 너 없는 삶이 두려워.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너 없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로...)
 
당신이 불길한 생각을 뒤로하고 복도의 끝에 도달할 즈음,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립니다.
 
디안 밀리테: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97
판정결과: 실패
 
케이 베르타:그러면, …… 없는 거지? 나도 알아. ……거면.. 곧 죽는다고.
 
앤 밀러:오,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거니, 케이.
 
케이 베르타:......이 말하는 거 들었어. 아빠도… 얼굴이 …….에 그렇게 됐잖아.
 
앤 밀러:케이…
 
이 목소리는 앤과 케이군요. 다만 거리가 먼 탓인지 목소리가 흐릿해 잘 들리지 않습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던 거죠? 앤은 침음성을 삼키며 케이를 안아주는 듯해 보입니다.
 
미약하게 작은 등을 토닥이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음울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케이 베르타:나는 다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앤도, 티아나도… 브랜은 돌아오는 거지?
 
그런 케이의 음성에 앤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케이를 감싸 안고 다독여줄 뿐입니다.
 
아이는 주변의 분위기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고들 그랬죠.
 
어제까지만 해도 활기차 보였는데, 속으로는 말 못할 걱정을 하고 있던 모양입니다.
 
브랜은 어디로 간 걸까요? 정말 돌아오기는 하는 걸까요?
 
아니면, 어쩌면 이미……
 
디안 밀리테:(불길한 생각에 입술만 꾹...)
 
밀리테가 부엌으로 가려거든 앤과 케이가 있는 곳을 지나쳐야 합니다.
 
디안 밀리테:(침음 삼키고 걸음을 옮겼다. 최대한 안 들키게... 부질 없는 바람이었지만.)
 
앤은 잠긴 목소리로 밀리테를 애써 밝게 대합니다.
 
앤 밀러:마침 부엌에 두 사람이 먹을만한 게 있으니 가져가요.
 
디안 밀리테:...네. (그대로 걸음 옮기다가.) 돌아올 거예요, 강한...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브랜 얘기임이 틀림없다.)
 
앤은 씁쓸하게 웃으며 그럴 거라고 답합니다.
 
부엌에서 먹을 것을 챙긴 디안, 이제 어떻게 하나요? 달리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면 더 돌아보고, 없다면 돌아갑시다.
 
디안 밀리테:더 둘러볼 만한 건... 없을 것 같네. (돌아가자, 로렌에게...)
 
건물 안을 수색해도 브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창문이 덜컹, 덜컹,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면 바깥은 한창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양인데도요.
 
건물 밖으로 나갔다 하더라도 이런 날씨에 발자국 따위가 남아있을 리가 없습니다.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아 전부 새롭게 쌓인 눈에 묻혀버리고 말겠죠.
 
✎:바깥에서 수색하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이 거대한 눈밭에 묻혀 시체조차 찾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쉘터의 사람들도 그러한 사실을 아는 탓에 함부로 바깥에 나가질 못하고 있었죠. 엘렌만 간간이 주변을 둘러보다 돌아오곤 하는 듯싶습니다.
어찌 되었건, 당신이 이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듯싶네요.
 
...
 
✎:당신이 부엌에서 가져온 식량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 방안에서 규칙적인 발렌틴의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푹 휴식하고 있던 탓인지 숨소리가 훨씬 편안하게 들려옵니다.
당신의 간호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이대로라면 그의 말마따나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나겠죠.
기숙사에 내려앉은 음울한 기운 가운데 그나마 희망적인 부분입니다.
 
당신이 발렌틴이 잠들어있는 침대에 가까이 다가가면…
 
찰박, 무언가 고여있는 작은 웅덩이가 밟힙니다.
 
디안 밀리테:
관찰력
기준치: 75/37/15
굴림: 63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당신은 손끝으로 바닥을 짚습니다.
 
서늘하게 식은 액체가 불쾌한 점성으로 닿아옵니다. 어쩐지 비릿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비릿한 냄새는 당신이 상체를 숙일 수록 더 짙어집니다.
 
그러니까… 발렌틴이 자고 있는 침대의 바로 밑에서요. 왜 이런 곳에서 이런 냄새가 나는 거죠?
 
설마, 발렌틴이 흘린 피는 아니겠죠? 아닐 겁니다. 아니어야만 합니다.
 
디안 밀리테:...로렌? 로렌, 거기 있지? (손 더듬어 침대 위부터 만져본다. 언제나 같은 네 체온 기대하며...)
 
당신이 침대 위을 향해 손을 뻗으면…
 
여느 때와 같은 체온입니다.
 
디안 밀리테:다행이다, 정말로... (여전한 온도라서 다행이야.) 그러면... (남은 건, 침대 밑. 손을 뻗어 보았다.)
 
당신이 침대 밑을 향해 손을 뻗으면…
 
당신의 손끝에 차갑고 딱딱한 것이 닿습니다.
 
생명이 꺼진 짐승의 그것처럼 소름 끼치는 감촉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손가락. 맥이 뛰지 않는 손목. 차갑게 식은 살가죽. 비릿한 냄새!
 
이건… 시체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인지한 순간,
 
플로렌틴 발렌틴:딘.
 
당신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거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지독하게 담담하고, 평온한 음성을요.
 
디안 밀리테:로렌. ...이게 뭐야?
 
디안 밀리테:
SAN Roll
기준치: 45/22/9
굴림: 96
판정결과: 대실패
 
이성 -2
 
발렌틴의 눈에는 이 상황이 보이지 않는 걸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코끝에 스치는 비린 냄새. 손끝에 닿았던 감각. 바닥을 적시고 있는 것은 분명 핏물일 겁니다.
 
이미 생기라곤 남아있지 않은 죽은 생물이 흘려 만든 시뻘건 웅덩이입니다.
 
...
 
무엇보다 당신은 그 경직된 손의 감촉을 기억합니다.
 
두툼한 손의 약지에 남아있던 반지. 엘렌이 찾던 바로 그 사람, 브랜이 아니던가요.
 
플로렌틴 발렌틴:바닥이 조금 지저분했나 보네.
몸이 좋지 않다 보니 실수로 물을 쏟았던 모양이야.
 
발렌틴은 지극히 평범한 어조로 당신을 향해 말을 겁니다.
 
바스락거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근처의 티슈를 몇 장 뽑아들며 당신의 손목을 감싸 쥡니다.
 
이윽고 젖은 손끝을 닦아내는 감각이 느껴집니다.
 
언제나 그러했듯 다정한 손길입니다. 마치 지금 닦고 있는 것이 정말 물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플로렌틴 발렌틴:걱정 마. 몸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 이런 실수는 없을 테니까.
 
그 음성은 지나치게 평이하게 들려옵니다. 고저 없는 억양이 기이할 정도로요.
 
일순, 당신은 말이 안 되는 소리인 것을 알면서도 이것이 정말 물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제 마시던 찻물이라든지요. 그 정도로 발렌틴의 반응은 평범하기 그지없습니다.
 
디안 밀리테: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2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당신은 그 담담한 태도를 보며 문득 무언가를 깨닫습니다.
발렌틴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되려 당신에게 권하고 있는 겁니다.
 
이대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이 없냐고요.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불쾌하게 끈적이던 것이야 발렌틴이 실수로 바닥에 쏟아버린 찻물이겠지요. 머지않아 깔끔하게 치워버리면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겁니다.
침대 밑에 무언가 있던가요? 분명 굴러다니던 잡동사니나, 죽은 쥐의 사체 따위였을 겁니다.
 
밀리테, 그렇게 될 겁니다. 당신이 그렇게 믿고 싶다면요.
 
디안 밀리테:로렌, 그만, 그만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을 것이 뻔했다.) 이게, 무슨... 무슨 짓이야. 우리한테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네가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벌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면 안 돼. 알잖아. 이걸 어떻게, 내가 모른 척하길 바랄 수가 있어? (손에 달라붙는 피의 감촉이 이렇게나 선명한데.)
 
당신은 현실을 마주하기로 합니다. 여기서 눈을 돌리면 무엇이 남을까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헛된 믿음? 거짓으로 쌓아 올린 안정감?
 
물론 당신이 진실을 외면하면 당신의 ‘현실’은 한치 변함도 없이 지속하겠죠.
 
어쩌면 그게 발렌틴이 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발렌틴이 섬세하게 닦아주고 있는 손을 거두어들입니다.
당신의 그런 태도에 발렌틴은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한숨을 내쉽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딘. 아무 일도 없었어.
그저 그렇게 알고 넘어가 주면 안 될까?
 
디안 밀리테: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렇게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손 문질렀다. 끈적하다.) ...이젠 그럴 수 없는 걸. 난 그런 인간이니까.
 
플로렌틴 발렌틴:때가 되면 전부 말해줄게. 이번 한 번만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나를 믿어주면 안 돼? 나를 사랑하잖아.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나를 믿지 못한다면 내 애정이라도 믿어줘... (손 뻗어 네 손목 붙잡았다.) 날 외면하면 그때는 더 이상 네 곁에 있어줄 사람이 없을걸. 네게 선택지가 있을까, 응? 디안...
 
디안 밀리테:...모두 말해줄 거지? 같잖은 침묵이나, 거짓말로 넘기지 않고. (여전히 네 온도는 내게 다정했고, 그래, 난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널, 믿어. 플로렌틴 카사 발렌틴. 네가 유일하다는 걸 믿어. 내 밤을 같이 새줄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 중얼거렸다. 체념 같기도 하고, 세뇌 같기도 한 말 끊임없이 되뇌였다.)
 
그야말로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말 못할 사정이라는 게 무엇인지, 발렌틴은 그저 같은 대답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차라리 벽을 두고 말을 거는 것이 이보다 더 효율적일 것 같네요.
 
그는 당신에게 단 한 조각의 진실조차 공유하지 않으면서 당신을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지고 쓰다듬습니다.
 
당신에게 닿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만적인 애정입니다.
 
당신의 두 손에 끊임없이 새롭게 흘려내는 간절한 사랑입니다.
 
붙잡았던 손목을 끌어 발렌틴이 당신을 안으면,
 
바닥에 고인 핏물의 비린 내음이 발치를 적십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물론이지. 나는 널 위하지 않은 거짓은 행하지 않으니까. 네 믿음만이 내가 말하는 이유라서... (조그맣게 속삭이지만, 안타까운 표정을 짓지만, 유감이라는 듯 기만적으로 굴지만... 그럼에도.) 사랑해, 딘. (입가에 번지는 것은 틀림없는 미소. 서리는 기쁨.) 의심하지 말아. 네가 가진 유일한 걸. (버리지 않을 거잖아. 그렇지?)
 
그리 속삭이는 음성은 어제와 같이 부드럽고, 다정한 음률을 지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밀리테.
 
✎:당신의 연인은 살인자입니다.
아직도 바깥에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브랜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겠죠. 당신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 방을 박차고 나가 그들에게 발렌틴을 고발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있었다 한들 그가 사람을 살해한 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당신은 원한다면 이대로 발렌틴의 살인을 묵인해줄 수도 있습니다.
 
✎:바깥은 아직도 폭설이 쏟아져 내리고 있으니, 그 하얀 설원 가운데 시체 한 구 숨기는 것 즈음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겁니다.
당신이 이대로 입을 다물어 준다면 쉘터의 사람들은 브랜이 멀리 떠난 줄로만 알겠죠.
시간이 흐르면 아마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것으로 추측할 겁니다. 그 누구도 발렌틴의 살인을 눈치채지 못하겠지요.
그렇게 이날의 일은 당신과 발렌틴 사이의 비밀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대로 발렌틴을 더 설득해 보는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에게서 제대로 된 설명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보나 마나 쳇바퀴를 돌리듯 같은 대답만을 반복할 것이 자명합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디안 밀리테:아, 그래. (내 가진 것은 오로지 너 하나 뿐임을 내가 어찌 의심하리... 내 세상이 모두 무너졌을 때 내 손을 잡아준 건 신이 아니라 너였다.) 내가 어떻게 너를 버려... (그것은 신을 고발하는 것과 동일하다.) 너 없는 세상이 너무 두려워, 네 사랑이 없을 날들이, 그래서 지금 보이는 이 암흑보다 더 어두울 하루가... (사랑해. 사랑해, 로렌, 정말로... 네가 무어든 상관하지 않아. 난 널 항상 긍정해야 하니까.) ...시체는 네가 숨길 수 있지? 밖에 눈이 많이 내리나 봐. 던져두기만 하면 나머진 눈이 모두 덮어버릴 거야...
 
당신의 긍정에 기뻐하는 기색임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비록 시체가 발치에 있더라도요. 발렌틴은 가만, 당신에게 입을 맞춥니다.
 
그 부드러운 입맞춤은 마치 대가로서 당신에게 선물하는 애정과 고마움 같습니다.
 
그럼, 딘. 할 수 있어. 다디단 속삭임 뒤에 다시금 입을 맞춥니다.
 
.
 
.
 
.
 
플로렌틴은 디안이 잠에 들기 직전까지도 곁에 붙어 있습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다감하게요.
 
한 치의 틈도 남겨두고 싶지 않다는 듯이.
 
사랑을 읊습니다. 아니, 사랑이라고 하기에 모독적인가요. 그래도 발렌틴과 당신의 애정입니다.
 
...
 
당신은 아득한 암흑 너머에서 누군가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은 흡사 신에게 올리는 기도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앞에 내밀어진 것은 썩어 빠진 동아줄이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벼랑 끝에 몰려서야 잡을 법한 망가지고 바스러진 구원입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하릴없이 허공을 맴돕니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가슴을 가득 채운 것들은 절망이었고, 체념이었으며,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한탄이었습니다.
 
머지않아, 당신은 익숙한 비명을 듣습니다.
 
육중하게 무너져내리던 것.
 
불에 덴 듯한 통감에 몸부림치며 신음하는 당신의 붉은 시야 너머 금이 간 건물의 파편이 보입니다.
 
정확히는, 그 위에 희끗희끗한 무언가가…
 
디안 밀리테:
정신
기준치: 40/20/8
굴림: 3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어?)
 
당신이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달력입니다.
 
‘February 2…..’
 
이윽고 눈앞에 익숙한 암전이 찾아옵니다.
 
.
 
.
 
.
 
케이 베르타:밀리테, 일어나요. 벌써 해가 중천에 떴다고요…!
언제까지 침대에 파묻혀 있으려고 그래요?
 
또랑또랑한 음성이 채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고막을 무자비하게 헤집습니다.
 
앳된 목소리로 중년의 말투를 흉내 내는 모습이 어쩐지 썩 익숙해 보입니다.
 
풀썩, 어느새 당신의 팔에 두 손을 뻗어 올린 케이는 당신의 몸을 좌우로 흔들어 깨웁니다.
 
케이 베르타:일어나요, 응? 앤이 혼자서 고생한단 말이야.
 
디안 밀리테:아, 벌써 시간이... (몸 부스스 일으켜 세우고) 깨워줘서 고마워, 케이. (웃음...)
 
당신이 몸을 일으키면 옆자리가 비어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발렌틴이 누웠던 시트 위는 체온 하나 없이 서늘하게 식어있습니다. 자리를 비운 지 이미 꽤 시간이 흐른 모양이에요.
 
디안 밀리테:...로렌은? 케이.
 
케이 베르타:벌써 다들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잠만 잘 거예요? 엘렌과 함께 브랜을 찾아 나선 지 이미 한참 되었어요.
 
디안 밀리테:아, 브랜을... (짧은 침묵.) ...눈이 좀 그쳤나 봐? 찾으러 나갈 정도로. 나도... 그래, 일어나야겠다. 밀러 씨 일 도우러 가야지.
 
케이 베르타:잘 모르겠어요. 그것보다 이거 줄 테니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요? (손에 막대 사탕을 올려준다)
 
디안 밀리테:(손 위에 올려진 것 만져보다가...) 막대 사탕? 이건 왜... 어떤 부탁인데?
 
케이 베르타:다들 바깥에 있어서 앤 혼자밖에 남지 않았어요. 이사하려면 짐 싸야 하는데, 앤은 허리가 자주 아파서 그렇게 힘쓰면 안 된단 말이야. 이것저것 큰 가방에 넣고… 나도 잘 몰라요. 그냥 도와주러 가면 안 돼요? 사탕 하나 더 줄게요.
 
디안 밀리테:그런 부탁이었구나. (옅게 웃음 터트리고) 그건 사탕 하나로 충분해. 이사... 응, 여길 떠날 때가 됐네. (시체와, 그 모든 걸 묻어버리고.) ...도와주러 갈게. 사탕 고마워. (네 머리 헝클어트리고 일어섰다.)
 
케이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에서 일어나면, 케이는 당신의 한쪽 손을 잡고 어딘가로 당신을 이끕니다.
 
당신의 손을 붙잡은 작은 다섯 손가락이 당신을 놓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합니다.
 
그래 보았자 성인에 비하면 작고 야트막한 악력일 뿐이지만요.
 
...
 
그는 얼마 가지 않아 큰 목소리로 환하게 앤을 부릅니다.
 
케이 베르타:앤! 도와줄 사람 찾았어!
 
앤 밀러:어머, 좋은 아침이에요, 밀리테.
 
쿵, 하고 묵직한 물건을 바닥에 내려놓는 듯한 소리가 들립니다.
 
소리만 들어도 무게가 꽤 나가는 것 같습니다. 앤은 손에 묻은 먼지를 털며 당신을 반깁니다.
 
디안 밀리테:좋은 아침이에요, 밀러 씨. 이사 준비 하신다면서요. 신세 진 게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는 없죠. 도와드릴게요.
 
앤 밀러:마침 조금 곤란해하던 참이었는데. 정말 도와주는 건가요?
 
일손이 많이 부족하긴 했던 모양입니다.
 
앤 밀러:일기예보도 없으니 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다들 모이면 언제라도 이동할 수 있게 미리 정리를 좀 해두려고요.
여기에 있는 물건을 이 가방에 넣어서 옮기면 되는데, 괜찮을까요?
 
디안 밀리테:아직은 계속 날이 안 좋나보네요.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했고.) 아, 네. 간단한 일은 맡겨주세요. (곧 물건 옮기기 시작했다.)
 
.
 
.
 
.
 
짐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나면 앤은 고마움을 표하며 밀리테에게 앞으로의 계획이 있는지 묻습니다.
 
앤 밀러: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디안 밀리테:글쎄요. ...일단 살아가는 걸 목표로 해야죠. 여기 사람들이랑 같이... 그래도 괜찮으려나요?
 
앤 밀러:짐 정리 도와줘서 괜히 그러는 것은 아니고… 우리 떠날 때 밀리테 당신도 같이 갈 생각 있냐고 먼저 물어볼 생각이었어요.
남쪽으로 가면 지금보다 날도 더 풀릴 테고, 무엇보다 혼자보단 여럿이 의지가 되고 좋잖아요. 정말로 같이 가는 거죠?
 
디안 밀리테:네, 로렌도 좋다고 했으니까요. (잠시 생각하다가) 남쪽은... 좀 더 따뜻하겠죠? 여기보다. 봄이 오면, 꽃도 필 거고...
 
앤 밀러:(잠깐의 침묵) 네, 발렌틴이 원한다면 밀리테랑 다 함께 가요. 꽃을 볼 수도 있겠어요. (웃는다.)
 
앤과의 대화를 마칠 즈음, 기숙사 입구 쪽에서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드디어 발렌틴과 엘렌이 돌아온 모양입니다.
 
....
 
............
 
분명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는데…
 
그 이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바람에 문이 흔들리기라도 했던 걸까요?
 
당신이 입구 쪽으로 향하면, 삐걱, 삐걱, 눈보라에 낡은 경첩이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문이 반쯤 열려있는지 건물 안쪽으로 차가운 겨울바람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내뱉은 입김이 뿌옇게 식은 공기를 데웁니다.
 
문의 잠금장치까지 풀어놓고서 아직 안에 들어오지는 않은 걸까요?
 
당신이 조금 더 문에 다가가면, 바로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엘렌 제이:지금 그런 부탁을 하려고 새벽부터 성치도 않은 몸으로 따라 나섰던 건가?
 
익숙한 음성입니다. 한쪽은 엘렌, 그리고 다른 쪽은 발렌틴이네요.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죠? 발렌틴이 할만한 부탁이라니요.
 
플로렌틴 발렌틴:더 이상 속이는 것도 무리니까요.
 
엘렌 제이:그러게 애초에 속이지를 말았어야지.
 
엘렌의 목소리에 발렌틴은 잠시 침묵합니다.
 
할 말이 없었다기보단, 표정으로 답을 한 모양입니다.
 
엘렌은 무언가 더 말을 하려다 이내 포기한 듯 낮게 혀를 찹니다.
 
엘렌 제이:이봐, 장담하건대 네가 죽고 나면 그 애는 절대 네게 고마워하지 않을 거다.
 
플로렌틴 발렌틴:그 말은 도와주시겠다는 말이네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뼈를 아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뇌리에 스쳐 지나갑니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것이 붉게 질려가는 손끝인지, 아니면 펄떡이며 뛰고 있는 심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당신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사이 소리 없는 정적이 한참 이어집니다.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었던가요? 두 사람은 왜 말이 없죠?
 
끼이익, 재차 낡은 경첩이 늘어지듯 우는 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찌릅니다.
 
...
 
엘렌 제이:일 났네. 나야 네 말대로 해도 상관없지만, 적어도 본인의 동의는 구해.
 
저벅거리며 쌓인 눈을 밟고 엘렌이 당신의 곁을 스쳐 지나갑니다.
 
아, 아무래도 두 사람은 뒤늦게 당신을 발견하고 대화를 멈춘 모양입니다.
 
✎:눈앞이 어둡고 캄캄합니다.
이래서야 지금 발렌틴이 무슨 낯을 한 채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지 그저 짐작만 가능할 뿐입니다.
어디선가 아득하게 낡은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묵직한 쇳덩이가 울리는 소리.
 
그에 맞추어 숨 막히게 펄떡이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집니다.
 
그 고요한 울림이 무겁게 호흡을 잡아 누릅니다.
 
마치 무대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처럼.
 
플로렌틴 발렌틴:...
날이 추워. 일단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발렌틴은 겨울바람에 차게 얼어붙은 당신의 손을 감싸쥡니다.
 
몇 시간 동안 발견될 리 없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닌 건 정작 발렌틴 본인인데 말이에요.
 
밀리테, 당신은 이미 당신의 연인이 당신으로부터 진실을 감추고 있음을 압니다.
 
그의 기만적인 애정은 여태껏 당신에게서 어두운 이면을 감추고 안락한 보금자리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나요?
 
당신은 진실로 발렌틴이 숨기려는 것들을 밝혀내고 싶나요?
 
디안 밀리테:(후회하겠지, 후회할 것이다. 진실을 듣고 나면 너나 나 둘 중 하나의 추악함을 못 견디고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 죄를 덮고 외면하기 싫다면 이것 또한 기만일까. 후회하더라도 너랑 함께 밀려 들어오는 죄를 삼키고 싶다면...)
 
✎:당신이 진실을 추구한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잘 되짚어 봅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세요. 여태 발렌틴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은 없었나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을 보거나, 듣고, 만지지는 않았나요? 기억 속에 모순은 없었나요?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이상했던 점은요?
 
당신의 연인은 단순한 의심만으로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닙니다.
 
아마도 발렌틴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러한 무대를 준비해 왔을 겁니다.
 
당신의 근거 없는 추궁에 빠져나갈 구멍 정도는 만들어 두었겠지요.
 
✎:명심하세요, 밀리테. 이 이야기는 당신과 발렌틴이 함께 오른 거대한 희비극, 그 기만적인 무대의 마지막 장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추구하는 만큼의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물어볼 거야?
 
디안 밀리테:응. 그래야 하니까.
...브랜 씨는 왜 죽인 거야?
 
플로렌틴 발렌틴:너와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려고. 딘.
 
디안 밀리테:그를 죽이는 게 왜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거지?
 
플로렌틴 발렌틴:(...) 1월 1일,
검사소에 방문한 네 혈액에서 역병 감염원의 특수 단백질 구조에 대항하는 항체가 발견되었어.
이후 제약 회사의 한 연구 기관에 잡혀 약 2개월간 끔찍한 인체실험을 당했어. 네가. (목소리에 물기 스민다. 쥐어짜내듯 말했다.)
나는 2월 29일, 연구소 건물이 무너지는 틈을 타 너를 구했고... 그렇게 곁으로 다시금 오게 했지. (한참이나 말 없다가...)
너는 실험의 여파로 부분적인 기억을 잃어서, 지금껏 연구소와 검사소를 착각하고 있던 거고.
브랜은...
 
플로렌틴 발렌틴:정말로 이거, 들어야 해? 디안. 나는 네가 내게 묻지 않고도, 아니,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디안 밀리테:내가 꿨던 꿈이, 실제였구나. (그 목 끝까지 차오르던 알 수 없는 고통이 모두...) ...들어야 해, 플로렌틴. 이건 나로 인한 문제야. 지금까지는 네가 모두 떠안고 있었지만... 난 네가... 나로 인해 이런 짓을 저지르길 바라지 않아.
말해줘, 브랜은?
 
플로렌틴 발렌틴:살아있는 인간을 죽이면, 하나씩... (하나씩 죽여갈 때마다. 목이 매였다. 목소리가 잠기지만, 억지로 끄집어낸다.) 내 시간을 늘려주겠다고 했어. 나는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이거든. 시체 밟아올라 연명하는 목숨이야. 어때, 딘. 역겨워? 당장 도망치고 싶어? (언성 높아진다. 아, 이제 정말 어떡하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나는 그냥...)
 
디안 밀리테:그게, 무슨. ...무슨. (네 맥박 치는 손목 붙잡았다. 여전한 네 온도였고, 모든 건 그대로일 텐데, 사실 하나가, 너무 무거운 사실 하나가...) 네가 사람을 죽여야만 살아갈 수 있다고? (나오는 목소리 지독하게 초라했다.) 네가, 네가 지금 살아있는 게 다른 사람의 삶을 밟아 살아있는 거라고. (아득했다. 네 인생이 너무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다. 넌 대체 어떤 하루를 살아온 거지?) ...로렌, 내가. (숨이 막힌다. 손이 떨렸고, 널 잡았지만 동시에 놓고 싶었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이젠 모르겠다. 이것도 사랑인가?) ...떠나.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었는 걸. (아, 모두 내 탓이다...)
 
발렌틴은 더 이상 당신에게서 진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당신이 손을 뻗으면, 발렌틴의 얼굴에 감긴 붕대의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집니다.
 
아, 이 끔찍한 역병의 마수는 기어코 당신의 연인에게까지 손을 뻗은 이후였습니다.
 
플로렌틴 발렌틴:이미 오래 전에 걸렸어. 네가 그곳에 끌려간 뒤로 심하게 악화되어서... (담담하게 가라앉는 듯싶다. 목소리는 일단 그랬다.) 죽음의 문턱에서 악신의 계약에 응했어. 이렇게라도 네 곁에 있고 싶었어. (이게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야. 알잖아.) 하지만 세상의 사람을 전부 죽여서 네 곁에 있기엔... (말이 끊긴다. 눈 앞이 흐렸다.) 어차피 그래도... 그래도 널 영원히 취할 수는 없어. 산 채로... (나는 이렇게 또 다시금 기억 속에 남겨지기를 바라야 했다.) 얼마나 생존자가 더 남았을지 몰라. 나는 네가 살았으면 해서. 엘렌에게 말해뒀어. 너는 저 무리에 섞여서 오래 날 기억해주는 거야. 아득하게 먼 미래까지. (눈물 뚝뚝 흐른다. 하지만 절망이라기보다는 집요함이다. 삶. 제 삶이 아니라, 네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이미 몸속의 장기는 손쓸 도리가 없대. 한쪽 얼굴까지 썩어가고 있어. (숙이던 고개를 들었다. 네 손을 감싸 제 목덜미에 대었다. 온기를 앗아간다.) 악신과의 계약이면 네 눈을 치료하는 건 너무 간단했어. (...) 그거 알아? 나는 네게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 싶었어... 기껏해야 보여주고 싶은 추레함이라면 내 밑바닥이지. 네가 보는 세상은 아름답지 않아서는 안 될 것 같아. 네가 네 시야를 빼앗았어.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빼앗긴 거야. 하지만... 그래도 넌 나를 사랑하지? 너는, (...) 너는 나밖에 없어, 딘... (제발. 강요였으나 부탁과도 같다.)
 
디안 밀리테: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왜... (묻는 형태였으나 답을 바라진 않았다. 그보다는 원망에 가까운 형태.) ...네가 그렇게까지 내 곁에 남을 줄은 몰랐어. 나는, 네 이기심을 믿었는데. 네가 끝이 오면 무엇보다 너 자신을 먼저 챙길 줄 알았어. (그러나 입 밖에 말을 내놓으며 곧 자신의 모순을 깨닫는다. 아, 나는 너를 여전히 일반적인 인간에 대입해서 보고 있었던 걸까? 모두가 나를 버렸고, 타인보다는 자신을 위했다. 그건 어떠한 진리처럼 제 뇌리 속에 박혀있었고 생각의 근원과도 같았기에 지금까지는 파헤쳐 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너에게 난, 뭐야? 난 네게 어떤 존재이지? 우리는... (너무 많은 세월을 함께했고, 사랑했는데, 남은 건 알 수 없는 것들 뿐이다.) ...싫어. 이젠, 싫어... 알아. 너 없는 하루가 얼마나 허무한지, 매일 네 이름 외우다가 지쳐 쓰러지면 꿈 속에서나마 널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겠지. 이미 잊은지 오래 된 목소리를 되짚고, 네가 내 이름을 어떻게 불렀는지 그거 하나만 떠올리다가, 정말 네가 날 사랑하긴 했는지 평생을 의심하다가 죽어갈 거야. 나는, 로렌... 나는, 그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어. 차라리 날 죽이고 네가 살아. 그 편이 더 나아...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누굴 죽여도, 내 눈을 앗아가도, 그래서 네 손길 없으면 못 살아남는 채로 있어도 괜찮으니까. 사라지지 마. 곁에 있어. 약속했잖아. 약속을 지켜, 플로렌틴 카사 발렌틴. 또 네 좋을 대로 영원으로 도망치지 말고! (분명한 분노, 그 원인은 두려움에 있다. 네가 없는 아침의 두려움...) ...난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있어 줄 거지? 모두를 죽여.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네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나는, 무엇도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너조차도.)
 
플로렌틴 발렌틴:이게 내 이기심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향한. (결국 실토했다. 내게 네게 영원히 숨길 수 있는 것은 없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고.) 사랑해, 딘... 나는 그게 좋아. 응. 그런 것 같아. 네가 내 무딘 칼에 아주아주 천천히 목숨 잃어가는 게 죽도록 좋아서, 그래서 나는 항상 이런 선택을 해. 너를 죽이는 나라도 사랑해주는 너를 너무 애정해서. (차게 쌓인 눈 위로 작은 흔적이 방울져 떨어진다. 내가 네게 가지는 죄책이 없어 이 모양이라. 일말의 후회도, 미안함도, 사죄할 마음도 없어서 울었다. 누군가는 환희의 눈물이라고 칭할 법도 한, 그런 행위-행위라고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나.-였다. 힘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소리가 엷어 웃음과 같은 울음소리였을지도 몰랐다.) 너는 정말 바보 같은 선택을 했어! 두 번이나, 사랑하는 것에 시야를 잃었네. 이젠 어떡해. (나지막한 외침과 같다. 이것조차 사랑일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맞을까? 어쩌면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스스로를 위해서라면 죽을 듯 아끼는 너를 죄 망칠 각오를 해버린 건 아닐까?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 지고했다.) 너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했지. 예전에도... 너는 너무 미련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리고 나는...) 내게 너는... (약혼자? 연인? 웃기기도 하지. 얄팍했다.) 내가 가진 전부. (모르겠어... 네가 나를 망쳤어. 죄를 넘기기는 이다지도 쉬웠다.) 나는 네가 아파도 괜찮아. 물론 마음이 많이 쓰리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건 안 돼. 네가 너무 아파서, 사랑하길 놓는 건 안 돼. (벽을 짚는다. 밑바닥에 끝이 있다면 필시 현재이리라고.) 너를 사랑하는 내가 너무 싫은 것 같아... 사람이 이렇게까지 깊게 사랑할 수 있을까? 딘. 이건 맹목이야. 너는 이런 것까지 다 받아줄 수 있다고 말하는 거라고, 지금. (몸에 힘을 풀었다. 맥없이 벽에 기대어 주저앉는다.) 도망치게 해줘.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내 생에 최선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최악의 선택을 했고, 또 후회하지 않았으므로.) 딘. (목소리보단 떨림을 꾸역꾸역 이어붙인 것 같다.) 아니야, 미안해, 사랑해줘... 약속 지킬게. 후회하지 말아. 저 사람들을 잔악하게 다 죽이고, 또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고, 우리에게 온기를 준 사람들을 짓밟아도 넌 후회하면 안 돼. 그러겠다고 해.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디안 밀리테:(제일 먼저 느낀 것은, 안도. 불행에 잠겨 죽어도 넌 여전히 내 옆에 있겠구나. 시야에 네가 잡히지 않아도, 네 욕심, 그것 하나는 여전한 것에 안심했다. 네 기만, 사랑, 맹목, 뭐라 딱 집어 칭할 수 없는 것이 네게 만연함이 기뻤다. 제대로 미친 사고였으나, 우리 둘 중 누구도 그걸 지적할 사람이 없으므로...) 하지만 널 사랑하지 않을 하루를 견디지 못해, 나는...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아니, 아니야... 너여야 해.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들에게는 그저, 호의, 몸에 베인 예의, 그 정도가 딱 알맞겠지. 거기에 사랑이란 정의는 과분해. 내 사랑은 네게서 나오는 걸... 언제나, 날 사랑해줄 이는 너밖에 없으니. (손 올려 네 눈물 훔쳤다. 상황을 인식한다. 울음, 웃음, 환희? 알 수 없는 정보값들 따라가기 벅찼다.) 단 한 번도 내 선택이 바보 같지 않았던 적은 없어. 돌이켜보면 난 항상 최악의 길을 걸어왔고. 근데, 그럼에도, 이것 하나면 괜찮을 것 같아. (손에 닿는 눈물, 미약하게 달아오른 네 뺨의 온도, 비수를 내리 꽂는 말을 할 때도 다정한 네 목소리...) 네 전부가 나구나. (웃었다. 이럴 때 웃음만큼 사람의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따라 입꼬리를 올렸고) 맞아, 내가 널 망쳤어. 이 모든 건 내 탓이고, 내 죄이며, 내 불행일 뿐이니까. 너는 그냥 이 바닥에 떨어진 불쌍한 이고... (널 있는 그대로 끌어 안았다. 네 귓가에 속삭인다.) 네 사랑은 너무 거대해. 그대로 안고 있으면 수축해 빛조차 삼켜버릴 지도 몰라. 하지만, 로렌, 난 평생 사랑이 고팠어. 내 모든 불행이 사랑에서 시작됨을 알 건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놓지 못해. 그건 그래... 내가 이상한 걸로 하자. 네 잘못은 내게 있어. 그걸 기억해. 넌 이제 나에게 손 내밀면 돼. 알아서 죽어가는 나를 구해. 네 욕심을 채워. (그럼 네 거대한 사랑은 내 것이 되고, 나는 네 것이 되는 거야. 이어진 네 사랑해달라는 말에 다시 웃었다. 상냥함을 가득 담아.) 사랑해. 네가 날 두고 기억 속에서 영원을 살겠다는 헛소리 지껄이며 떠나지만 않으면, 네 죽음마저 사랑할 자신 있어. 저들의 온기는 너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하니... 로렌, 네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돼. (이상하지, 분명 이곳이 바닥일 텐데도, 이 순간만큼은 찬란하다고 느꼈다. 찬연한 생보다 아름다운 것이 네 사랑이었다. 오직 이 세상에서 너만이 줄 수 있는.) 네가 날 죽여도 기쁘니, 오로지 날 떠나지만 말아. 사랑해, 언제나... 사랑해, 로렌.
 
언젠가 발렌틴의 끝이 와도, 그럼에도 당신만큼은 살아남겠죠.
 
설령 이 쉘터의 사람들이 모두 감염되어 죽는다고 하더라도, 당신이 항체를 생성하는 한 당신만큼은 세상의 끝까지 무사할 겁니다.
 
발렌틴이 당신을 감금한 연구소를 무너뜨리며 당신을 빼내온 순간, 이는 어찌 보면 예견된 결말이었습니다.
 
발렌틴은 세상의 다른 그 무엇보다도 당신 한 명의 손을 잡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인류의 구원이었으며, 당신만이 멸망 가운데 구원받았습니다.
 
✎:발렌틴은 손목에 걸린 시계를 매만지며 자조하듯 남은 수명을 말합니다.
브랜을 살해한 것은 그저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번 것뿐이라고 말하면서요. 이미 그의 손은 당신이 만나지 못했던 수많은 생존자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수색을 지속해왔던 그 오랜 시간 동안, 대체 몇 명의 목숨이 스러졌는지 모를 일입니다.
 
발렌틴의 고해에 당신은 손을 놓지 않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운 음률을 지녔습니다. 아마도 이게 발렌틴의 최선이었을 겁니다. 썩어가는 내장을 붙들며 생존자를 수색하고, 가능한 한 당신의 곁에 오래도록 남고 싶다는 바람을 내려두기까지 얼마나의 낮과 밤을 반복하며 고민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마침내 결단했을 땐 기뻤을지도 모르겠어요. 자신의 이기심을 당신의 애정으로 영원히 메울 수 있을 테니. 설령 당신이 발렌틴 자신을 잊고 살아간다 해도… 더 이상은 살인을 자행할 힘조차 없이 지쳤어요.
그는 자신이 죽을 자리를 찾는 짐승과 같이 이 거대한 무대의 종막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온 이후 홀로 남을 당신의 미래를 고민하고 계획했습니다.
 
끝까지 이기적인 다정으로, 당신에게 끝까지 단 한 조각의 진실도 나누지 않으면서요.
 
그토록 절실하고도, 아플 만큼 기만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당신은 모든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간 당신의 연인이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과, 그의 수명은 다른 사람의 생명의 불씨를 꺼뜨리며 이어진다는 사실을요.
당신의 연인은 기만자이며, 살인자입니다. 멸망한 세상의 악인이며, 그의 하루하루는 타인의 생명을 제물로 삼습니다. 그는 무고한 생명을 살해하며 당신과 함께할 시간을 마련합니다.
아마도 그는 언젠가, 필연적으로 온몸을 역병에 잠식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테지요. 당신을 이 세상에 남겨둔 채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의 곁에 남기를 선택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연인 사이에 더 이상의 비밀은 없습니다. 그동안의 기만적인 사랑은 고이 접도록 해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 진실한 낯으로 서로를 마주합니다.
우리의 진실한 사랑은 짙은 피비린내가 납니다. 세상에 들끓는 썩은 시체보다도 지독한 악취입니다.
그야말로 멸망한 세상에 걸맞은, 이기적이고도 잔인한 사랑입니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거세게 휘몰아치던 눈바람이 멈춘 세상은 고요합니다.
당신은 묵직한 배낭을 들고 쉘터를 나섭니다. 보이지 않는 두 눈으로 까마득한 앞날을 가늠합니다.
 
플로렌틴 발렌틴:갈까, 딘.
 
✎:그런 당신의 한 손을 잡아주는 손길이 있습니다. 부드럽지만 견고하게. 언제까지나 당신의 옆에 남아 당신의 곁을 채워줄 발렌틴이 앞길을 밝히듯 당신을 이끕니다.
 
디안 밀리테:응, 로렌.
 
✎:두 사람은 오늘도 생존자를 찾아 나섭니다. 그들의 삶을 강탈하고, 앞으로 함께할 시간의 양분으로 삼도록 해요. 이 멸망한 세상에선 그 누구도 당신을 비난하지 못합니다.
당신과 발렌틴의 여정은 계속됩니다. 두 사람의 발치에 진득한 핏물이 고이고 고여, 더는 흐를 수 없을 때까지.
 
KPC 생환?, PC 생환
 
엔딩 보상 이성 회복 1d4
 
현재 세상에 남아있는 생존자 수는 103명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살인을 계속하며 발렌틴의 수명을 연장해갑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진실한 사랑이 막을 내릴 때까지, 두 사람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