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럴 게, 잠결에 한 소리라고 치부하기엔 이미 졸음이 다 가셨다는 것처럼 또렷한 눈을 하고 있는 걸요.
그대로 손 뻗어 고해림의 눈가 흉터를 한 번 매만진 정세현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립니다.
이렇게 순수한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사랑을 고하던 날이 있었을까요.
있었다 하더라도 고통인지 증오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의 결과물이었을 텝니다.
정세현은 고해림에게 언제나 지옥 같던 감정만을 전하지 않았나요.
그 안에 들어있던 감정이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만이 명백했습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정세현은 다시 한 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정세현:내가 널 사랑하는 게, 별로야?
고해림:무, 무슨 소리야. 요즘 많이 힘들어? 애가 왜 이러지. (깜빡인다...)
...넌 그러면 안 되잖아...
정세현:왜... 좋지 않아? 누군갈 사랑하지도 못하는 놈이 네 앞에서 애정 갈구하고, 진심으로 웃어주고... 이런 밑바닥이 보고 싶은 거였잖아... (툭, 네 어깨에 고개 묻곤 대답할 새도 없이 중얼거린다. 다소 강압적으로.)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죽여버린다고 해도 난 너를 사랑할 거야.
드디어 제대로 알아버렸거든... 우리를 옭아맨 이 감정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내 영은, 영원히 너에게만 내어줘야 한다는 걸. 그게 '인간' 정세현의 운명이라고...
정세현은 그 입술로 사랑을, 운명을 입에 머금습니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한 생애도 아닌 한 순간의 곁만 허락했던 이의 입에서 영원이 쏟아져나오다니요.
철벽 같은 댐은 구멍 하나가 뚫리면 삽시간에 무너져버린다고 하던가요.
손가락으로, 손으로, 몸으로 댐을 막던 소년의 이야기는 허구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처럼 정세현의 마음은 온통 감정이 터진 듯이 무너진 댐처럼 굴고 있습니다.
고해림:너만은 날 사랑한다고 말하면 안 되지. 완전히 틀렸어. 넌 날 혐오해. 세현아. (온기 한참을 가만히 받아들이다 억지로 팔 움직인다. 네 어깨 꾸욱 밀었다. 유약하게 굴 듯이 위태로이 눈동자는 흔들리지만 마주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놀리고 나갈 준비나 해. 스케줄 있다며. 내가 놀아나는 게 재밌지, 아주.
정세현:그럼 널 너무 혐오한 나머지 네가 없으면 안 되는 몸이 된 모양이지. 남들은 이것도 사랑으로 치부하던데. 너만... (너만... 그걸 부정하고 있잖아. 제 눈 한 번 마주하지 않는 얼굴 지그시 바라보다 슬 입꼬리 올리며 TV를 틀었다. 나갈 생각이 없는 양.) 정정할게. 네가 재밌어. 좋아해. (큭큭.)
고해림:(갈무리하고 미심쩍은 낯으로 옆에 앉았다. 답잖게 소파에 기대어 늘어진다. 중얼였다.) 멍청이... (애써 너 그만 신경쓰려는 티 난다. TV 멍하니 바라본다.)
화제 전환하듯 켜진 TV에선 흔한 가십거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유독 유명인들의 결별 소식이 많이 나오고 있네요.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던 한 부부도 이혼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매니아들이 수집하는 물건들이 많이 버려지거나 기하급수적으로 중고 마켓에 올라오고 있다는 사소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 영원히 노을이 지는 이내길, 시간이 흐르면서 멈추고 있는 이곳에서 너와 마지막 하루를 보낼게. 】
노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 티켓 같네요.
그러고 보니 한 5년 정도 전에 흥행에 실패한 이내길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만들어진 이내길이라는 버츄얼 리얼리티 관광지가 개발되고 엄청나게 흥행했다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버츄얼 리얼리티 관광지(VRT).
4D 체험을 조금 더 발전 시킨 것으로 인간의 정신 자체를 가상 세계로 소환하여 하나의 세계를 구현하는 시스템입니다.
두 사람은 이 VRT를 보러 온 모양입니다.
어지간한 부자도 한 번 정도 온 게 다라고 할 정도의 금액인데요.
정세현은 담담하게 입을 엽니다.
정세현:나, 그 영화 봤었거든~. 낮이 없는 세계. 노을과 밤밖에 없는. 자세한 내용은 기억 안 나고 노을이 지는 것만 어렴풋하게 생각나는데, ... 그 노을을 잊을 수가 없어서.
흐... 사랑하는 사람과 오고 싶었어. 영화의 결말까지 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 네가 응해줄진 몰라서 아침에 일단 예약부터 했지만.
고해림:(사랑 얘기 나오자 몸 움찔한다. 고개 일으키고 창 밖에서 네게 쏟는 노을 훑는다.) 예쁘네. (건조한 감상. 그러나 여태의 질척이고 어두운 불순물 같은 감정에 섞여든 이 아름다운 풍광은 마음 약해지게 하기에 아주 좋았다.) 그만하면 안 돼? 이제. 재미 없다고... 사랑 놀이.
...너 일부러 이러지. 내가 너한테 어떤 마음으로 고백했는지, 다, 알고 이러는 거지... 나 아프라고.
정세현:(그럼에도 네게 시선 떼지 않았다. 열렬한 애정. 순수한 사랑. 제게 어울리는 단어는 무엇 하나 없었음에도 정세현은 이를 사랑이라고 불렀다. 되려 네 언어 하나하나에 상처라도 받은 양 늘 샐쭉 웃던 입꼬리 내려가고 만다.) ... ...
사랑해. 좋아해. 해림아. 내가 네게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까. 나 이기적인 거 알고 있잖아. 너야말로, ... 일부러 이러지. 그동안 너 힘들게 한 거 갚기라도 하려고. (형형한 눈동자 마주하며 네 양팔 붙잡았다. 여전히 강압적이다.) 사랑한다며... 내 밑바닥이 보고 싶다며. 네가 여기까지 끌어내렸잖아. 네가 날 망가뜨렸잖아... 네게 하는 말들, 행동, 이 모든 순간이, 씹... 전부 아무 의미 없는 거짓말과 같다고 말하는 거야? 나는 또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고해림:정상이 아냐, 항상 그랬지만, 나는 이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도 못하겠어. (창밖으로 흘러가던 눈동자는 붙잡은 너로 인해 네게로 돌아왔다.) 그래, 내가 너를 망쳤어! 정말로 죽여버리고 싶었거든. 네가 내 심장을 헤집었잖아. 그 대단하신 프라이드로. 너한테만은 다정하게 굴고 싶지 않아. 이게 네 밑바닥이라면, (고개 숙인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날숨이 둘 사이의 거리를 채웠다.) 너는 나보다 더 엉망진창이야... (수없는 죄책이 뒷목을 내리누른다, 그것은 곧 온몸에 스며 한없이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을 자아냈다.)
내, 내가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너는, 들어줄 것처럼 굴어놓고선. 결국 이렇게 다시 한 번 더 나를 끌어내려... (얼굴 약간 일그러뜨린다. 울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증오한다고. 세현아. 나는 널 그만 사랑할래. (낮은 음조가 불가능한 희망을 뱉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냥 거짓말이라고 해줘. 사랑 같은 거. 그저 나를 갖고 논 거라고. 진실이 아니었다고.
정세현:... 하! 뭐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따지는 건 진즉 그만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좋았잖아. 혐오하고, 사랑하고, 또 지독한 온기가 좋아서 상처받고. 정세현 딴에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더랬다. 처음으로, 이토록 순수한 애정을. 그 감정이 부정당할 때의 기분, 넌 절대 모를 거야...) ...... (억세게 팔 붙들던 손 하나가 네 뺨으로 향한다. 습관처럼 흉을 찾는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살결 새로 불규칙하게 난 상처를 더듬고 나면, 또 다시 순응하고 만다.) ... 알아. 엉망진창이야.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역겨워. 난 지금... 내가 혐오하던 딱, 그 모습이라고. (시인했다. 나도 인간이야.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알고. 그 감정이 무엇이든, 표현할 줄 알고.)
그러니 너도 더욱 망가져야지. 해림아... 지금 나만큼 고통스러운 거잖아. 날 사랑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사랑이나 혐오보다 외로움을 더 싫어하면서. (끝까지 네가 원하는 대답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늘 서로의 기억에 최악을 새긴다.) ...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직접 겪고 확인해. 그러니까 지금은, 옆에만 있어. 회피하게 두지는 않을 테니.
고해림:그랬겠지. 너랑 있을 때만은 그따위 거, 신경쓰지 않았으니까. (그 누구보다 올곧은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 내가 네 앞에서만은 항상 엇나갔으니까. 한여름 청춘 사춘기의 일탈보다는 무겁고 내장 헤집는 살인보다는 가볍다. 네가 차근히 오래도록 건네준 생채기를 하나하나 전부 그러모으면 내 심장을 짓물러 죽일 수도 있다. 고작 스스로가 덜 괴롭기 위해 상대의 감정을 부정하는 기분이란, 사실 그 부정에서 기인한 죄책을 견디는 게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고해림은 눈을 가렸다. 몸속 깊은 곳에 틀어박힌 타성이 네게는 물러졌다. 눈가에 닿아오는 손길에 움츠러들기보다는 이제 지독한 안정감을 느낀다. 힘겹게 시선은 네 흉터로. 가지런하지만 당시의 두려움으로 조금은 굴곡진 붉은 자국이 꼭 증명 같다. 어느새 차게 식은 손으로 네 목을 감싼다. 어느 겨울날의 섬 바닷가처럼 차가운 손으로. 적당한 힘으로 쥐고 네 맥이 뛰는 간격에 제 숨소리를 맞춘다. 차마 더 강하게 쥐어낼 자신이 없다.) 네가 바란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네 애정보다 더 구원한 습관. 고해림은 고개 숙여 긍정할 수밖에 없다, 네 요구라면 무엇이든. 손 떨어뜨린다. 제 흉터를 한 번 훑어봤다. 네게 닿아있지 않아도 꼭 그런 것처럼, 습기 가득한 유대감 따윌 느꼈다.)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정세현:(그 언젠가부터 익숙해진 대답. 그간의 정세현에겐 간절함도, 불안도, 어떤 변수도 없이 반복됐을 혐오에 점철된 애정. 고해림에게 특별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언제나와 같은 네 모습을 보고 화한 쾌감이 아닌 안도감을 느낀다. 변한 건 오직 자신이다. 이런 모습까지 받아주는 너를 보고, 지독한 유대감을 느끼는 비이성적 관계를 사랑이 아니면 무어라 정의할 셈인가.) 봐... 너도 망가졌고, (날 사랑하고 있다니까. 혐오하는 딱 그만큼, 고통스러울 정도로.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확신이 든 순간, 해줄 말은 많지 않았다.) 정말 같아졌네... 우리. 같은 생각, 같은 마음, 전부 다... (그제야 입가에 미소 번진다. 이어지는 말은 방금 있던 일이 허상이라도 되는 양 일상적이기 그지 없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 VRT에 대한 이야기, 내가 그 영화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부러 말을 돌린 것 같기도 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해림은 아침에 일어나 정세현이 그 자리에서 바로 충동적으로 예약한 호텔의 VRT를 선뜻 응해줬고 그와 함께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이 VRT는 영화의 전부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구매자가 희망하는 몇몇 컷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곳은 총 세 번째 컷입니다.
기차의 창밖을 바라보면 같은 풍경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고해림은 본 적이 없는 영화니 그곳에 정말 기차를 타는 장면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죠.
(순간 입 밖으로 달뜬 욕망을 뱉어낸다. 무미건조하고 서느렇고, 다정하게.) 사실 가끔 생각해. (네 목 잡아 끌어온다. 제 쪽으로.) 그때 내가 손을 떨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깊게 그었다면 네 눈을 아예 못 쓰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단순히 입 맞췄다. 고개 기울여 조금 파고들다가 말 잇는다.) 나는 왜 항상 네 앞에서 내 욕망을 눌러야만 했는지 의문이 들어...
정세현:...... (그 모든 행동 가만히 받아들였다. 짧은 순간 입에 닿은 온기는, 눈만 쓰지 못했다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달가운 유흥거리로 느꼈을 정도의 익숙함이라. 이어지는 말에 차라리 그렇게 만들지 그랬어... 속으로 대꾸하고 만다. 짧게나마 경애와 순종을 표하던 눈의 빛이 사그라든다.) 네가 날... 사랑해서 그래. 사랑하는 만큼 증오해서 그래. 그 욕망 전부 보이면, 넌 언제까지나 내게 지기만 할 테고, 그게 분하고, 그럼에도 후련히 날 놓아줄 수도 없어서... ... 아쉽다고 생각했지. 미련도 사랑이니까. (제쪽에서 네 이마에 짧게 입술 맞댄다. 그리고 떨어졌다.) 봐. 또 네가 졌잖아.
고해림:(중독된 것처럼 굴었다. 잠깐 정신 차리면 밀어냈다가 끝내는 다시 옆에 있을 수밖에 없어서. 고해림은 그게 싫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정말 싫었다. 삶에서 멋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많았으나 너만한 깊이는 처음이라 미숙해서, 져버리고 만다.) 나 정말로 다 망쳤어, 너 때문에. 고작 너 하나 증오하고, 사랑하느라. (이제는 나에 대한 희미한 확신조차 안 들어. 그걸 직감하게 돼. 손꿈치로 이마 얕게 쓸었다. 엷은 소리로 불만 토해내다가 걸음 다시 바로 한다. 가볍게 농담한다. 비아냥.) 1군 아이돌이나 되어서 동급생 여자애 하나 이겨먹으니까 좋아?
정세현:... 좋은데? 그냥 동급생 여자애 하나가 아니라, 고해림이라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널 이 정도로 망가뜨릴 수 있어서. ... 너도 그래서 날 좋아하는 거잖아. (고작 일찍 사회 나간 동급생 남자애 하나 끌어내리려고.) 그래도, 오늘만큼은 무승부야. 그게 사랑의 증거고.
밤길의 숲 속을 걷다 보니, 어느새 시야가 밝아집니다.
인공적인 빛이 두 사람의 시야를 파고듭니다.
아, 그 사이에 호텔에 도착했군요.
숲 속의 호텔, 이곳은 이내길의 주인공인 성현과 지연이 하룻밤을 머물고 간 곳이라고 하죠.
숲 속에 있길래 아담한 펜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번쩍번쩍하게 빛나는 것만 봐도 호텔이네요.
정세현은 영화 속 이야기를 하며 고해림을 방으로 안내합니다.
주인공 두 사람이 이곳의 불빛을 보고 숲을 찾으러 왔고,
그 둘이 머물렀던 호수는 404호실이라고 하네요.
꼭 404 오류를 생각나게 하는 이름입니다.
물론 이내길이라는 영화가 그것까지 노리고 만들어지진 않았을 테지만요.
고해림:oO(기분나빠..................)
정세현은 정말 그 영화를 좋아하는 게 맞는 것인지 자연스럽게 열쇠를 받아 404호로 향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불쑥 다정한 향이 코를 파고듭니다.
다정한 향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내음은 서글프게 두 사람을 감싸안습니다.
전체적으로 앤틱하게 꾸며진 호텔의 안은 아주 오랜 시간 두 사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굴고 있습니다.
빠져나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곘으나 사랑한다는 끊임없는 고백은 어쩌면 당신을 향한 열렬한 확신이며 자신을 향해 주는 다짐 같기도 합니다.
고해림:(고해림치고 제법 불량하게 건드리던 손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대강 넘겨주고 떨어진다.) 바보. 변하지 않는 건 없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 것 같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직감한 것이든 희망사항이든... 고해림은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살아서가 되든 죽어서가 되든 언젠가,
우리는 서로를 그만 증오하게 될 거야.
그때는 네 사랑도 내 사랑도 끝나겠지.
나는 그날만을 기다려...
정세현:(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있을 문장들. 굳이 입에 담지 않는다. 순전히 저를 위한 선택이다.) 잔인하네... 너. (사랑도, 증오도 그 무엇도 없는 우리를 바라는 거야? 이 역시 묻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중얼거리는 말은 이윽고 사랑해라는 세 글자로 귀결됩니다.
그것이 당신의 이름이고 나의 이름이라는 것처럼.
이 밤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내 사랑은 끊이질 않을 거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두려움, 슬픔, 우울함 같은 것에 젖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때요. 이런 정세현은 고해림이 사랑하는 정세현일까요.
정세현: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잖아. 그래야만 해. 드디어... 내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다 한 것처럼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해 그 외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그래. 이런 기이한 애정에 목숨을 거는 게 사랑이 아닐까?
정세현은 불안정합니다. 그것만은 명백한 진실이죠.
하지만 그것만이 진실은 아닙니다.
정세현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당신을 원하고 있고,
원하던 대로 망가졌으며,
이것은 사랑에서 한 겹 나아간 집착입니다.
사랑에 대한 집착, 당신에 대한 집착.
이것을 우리는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요.
고해림:(위태로운 너를 봤다. 고해림은 한 치도 배려할 수 없었고, 상냥하게, 다정하게 굴 수 없었다. 네가 이토록 이기적인데, 홀로 헌신하기가 두려웠다.) 세현아.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나만이 너를 온전히 사랑해. 너는 내 전부를 사랑할 수 없어...
정세현:(피차 상대 갉아먹으며 살아오던 사람들이다. 이기적이고, 추잡하고, 그득그득 찬 제 욕망 숨기며 남의 것만 끌어내리던... 그래서 어떤 말도 수용할 수 없었다. 수용하지 않는 게 맞았다. 사랑이 맞는지 아닌지는, 감히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고해림. 넌 그냥, ...) 어느 쪽이든 받아들여. 내 어떤 감정이라도.
(짧은 숨. 주제 돌리듯 옅은 미소 보인 채.) 여길 넘어가면 엔딩을 보게 될 거야. 난 이곳에서의 기억으로 평생을 갉아먹고 살 테니까, 넌...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말에 순응하고, 인정하고 사랑해. 여기서 더 무너지면, 약속 어기고 널 외롭게 만들어버릴 것 같으니까.
고해림:(굳게 박아넣었던 부정이 어지러이 흐트러진다. 네 말 한 마디에 삶과 죽음을 오가는 비정형을 느꼈다. 네 미소에 심장소리는 커졌고, 눈꺼풀이 내려감기다가 이내 눈 감는다. 최선의 회피였고, 고해림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직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서.) ...안 그럴게. 앞으로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게. 그런 협박은 하지 말아줘...
너는 나를 사랑해.
나도 그래.
우리는 증오하는 만큼 애정해.
세현아. 그건 항상 진실일 거야. (마침내 인정한다. 너를 만난 이래로 가장 무겁고 버거운 진실을 뱉었다. 고해림은 시인한다.)
정세현:괜찮아. 너 달려왔어도 같이 넘어졌겠지. 문제는... (여기가 아니라 저쪽이니까. 하며 시선 원인제공자에게로 돌린다.)
시선으로 그 자전거를 따라가보면 그는 급기야 자전거를 버리고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상대쪽에서 오던 사람도 보란 듯이 상대에게 달려가고……,
무슨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둥켜 안고 있네요.
대충 눈치를 보니 두 사람이 재결합을 한 모양이에요.
연인 사이에 이런 일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니까요.
얼마나 급했으면 저렇게 달려갔나 싶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는 아니죠.
한심하다는 듯 눈 한 번 흘린 정세현은, 붉어진 제 손바닥 펼쳐 보이며 장난으로 무마합니다.
정세현:호~ 해줘. 미안하면.
고해림:(흐린눈...) 생각해 보니 별로 안 미안한 것 같아. 이따 치료해줄게.
정세현:다음엔 오토바이 앞에 서 있을까...
고해림:(하..............) 네 손 씹어버리기 전에 마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어. 진짜로. 완전히. 정말.
정세현:... 진짜?
고해림:...짜증나. (호...~)
정세현:(결국 해줄 거면서. 큭큭 웃는 낯 여상하다.) 넌 이렇게 그대로인데. ...
왠지 이 노을이 지면 모르는 길이 나올 것 같아.
정세현은 아까부터 답지 않게 꽤 감상적인 느낌입니다.
그리고 미묘하게 고해림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두기 시작하네요.
앞으로 걸어가던 정세현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툭, 떨어집니다.
그는 눈치도 못챈 양 그저 걸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보여주었던 수첩인 것 같네요.
꽤 애지중지하게 여겼던 것 같은데 저렇게 잊어버린 것처럼 지나가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아니면 살짝,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고해림:(세현 뒷모습 허전한 듯 한 번 보더니 수첩 주워 내용 본다...)
첫 번째 페이지. 책의 일부를 찢어내거나 복사한 것 같은 종이를 잘 접어두었습니다.
▶:『 행복 총량의 법칙 : 한 공간에서 가질 수 있는 행복은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존재하는 생명이 많을수록 하나의 존재가 가져갈 수 있는 행복은 줄어들게 된다. 누군가가 오롯이 행복하게 되면 누군가는 오롯이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
『 이 세계는 여러 개의 법칙으로 지배되고 있다. 총량의 법칙 그리고 ■■의 법칙 등이 대표적이겠다. 둘은 공생 관계로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필요할 경우 불순물을 제거하기도 한다. 인류가 아닌 존재하는 이 우주를 위해 생성된 법칙은 기본적으로 이들에게 관대하고 여럿의 기회를 주나……. 』
이 뒤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다음 페이지로 넘길까요?
고해림:(읽을 수 있는 곳까지 다 읽고 넘긴다.)
이내길 영화 티켓이 꽂혀 있던 자리입니다. 정세현의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남겨져 있습니다.
아마 대사 일부를 받아적인 것 같습니다.
▶:ㅡ 사랑의 신은 역사적으로 늘 있어왔어. 억지로 사랑하게 하는 것도 가능했지. 그치만 결국 그런 사랑은……, 벌을 받지 않았던가? 그렇게라도 사랑하고 싶은 건가?
ㅡ 하지만 억지로 만든 사랑이라도 진심이라면 그걸 비난할 사람이 있나? 지금은 낭만의 시대 아니에요?
ㅡ 만들어진 낭만은 연극에 불과하니까.
ㅡ 꽤 단호하네요. 저는 그런 연극도 좋아해요. 방금 우리가 한 입맞춤처럼요. 우리는 지금 입을 맞추기로 합의한 뒤에 입을 맞춘 거잖아요? 이것도 연극 아니에요? 그치만 낭만적이었어.
(...문득 앞서가는 세현 본다. 한숨과 같이 잔웃음이 나왔다. 결국 부서지는 건 우리야. 항상.)
▶:이성 감소 없음
고해림이 수첩을 다 읽고 나서야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멈추어 섭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수첩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는지 열심히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습니다.
얼마 안 가 당신의 손에 들린 걸 확인했는지 천천히 다가옵니다.
정세현:떨어뜨렸었네. 돌려주라.
고해림:(아무 말 없이 건넨다.) 왜 나랑 같이 노을을 봤어. 영화 속 장면 보여주고 싶어서, 그게 다야?
정세현:... 봤구나. (네겐 더 숨길 것도 없겠다. 그리 되내었다. 네가 알고 있는 나는, 언제나 밑바닥이어야 하니까.) 그거 알아? 이내길은, ... 사실 '이별길'이라는 말의 별 자가 녹슬어 지워진 거야. 이내길이 아니라, 이별길을 걷고 있었으면서. 그게 다라곤 못하지.
네가 그랬지. 난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응시한다.) ... 알고 있는 게 있어? 난 갑자기 널 미친듯이 사랑했다가, 또 지금은 전부 역겨워져서...
고해림:(한순간에 끌어내려진다. 이보다 더 깊은 곳이 있을까 싶다가도 이런 너를 받아들이면, 매번 훨씬 낮은 곳으로 가게 됐다.) 한순간의 변덕이었나 보지. 그럼. (행복에도 총량이 있다면 애정에도 총량이 있으리라 자연히 생각한다. 너와 나 사이에 잔존하는 단어들을 그런 기계적인 절차로 치부하고 싶지 않아 유연히 넘겼다.) 난 네가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도 믿지 않을 듯 얄팍한 어조.) 그런데 가버리지는 마. 앞서가는 것까지도 괜찮아. 날 내버려 두지는 말아달라고...
정세현:(한순간의 변덕. 제게 사랑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았을 터인데, 별다른 이유를 찾지 못해 반박 없이 그대로 담는다. 이상하지. 사랑을 갈구하는 건 너고, 원치 않는 것 역시 너다. 느끼지 않아도 될 감정을 억지로 떠맡은 기분이다. 웃음기 사라진다.) 너, 애초에 내 사랑 같은 건 원하지도 않았구나. 난 이 역겨움 속에서도... 계속해서 널 사랑하고 있는데, 이제야 사랑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괜찮아? 이런 사랑을 주지 않아도.
내가 널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 (지금처럼 널 미워할 애정도, 시간을 쓸 필요도 없어지는 거잖아... 당최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어. 아아... 이딴 게 사랑이라면, 차라리 죽여버리는 편이 낫겠다. 그 생각까지 가자, 네게서 시선 떼어낸다.)
고해림:(원하지 않는다. 너는 있어도 아프고, 없어도 아픈 존재라. 네 사랑도 마찬가지다. 네 증오도. 결국은 너와 네 애정과 네 혐오 모두를 갈망하고 있으면서도 괴롭다고 밀어내는 꼴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사고회로 온전치 못하다.) 너는 나를 미워해. 싫어하고 염오하고. 그냥... 그냥 그거면 돼. 네가 나를 떠나지 않을 정도로 진득한 감정 그거 하나면 충분해. (그 증오 또한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고해림은 받아들일 것이다. 낭만이 아니라 증오에서 기인한 사랑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것이다. 작금의 네 첨예하고 잔인한 시선을 알았다. 감내한다.)
싫어한다고 말해줘... 정말로, 죽도록 혐오해서, 널 떠나지 않고 영영 낙인으로 남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줘.
정세현:(저를 누구보다 낮은 곳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면서도, 똑같은 사랑이 아닌 혐오를 바라는 건 이 세상에 고해림이란 인간 단 하나밖에 없으리라. 이해가 안 되는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음에도 그 뒤틀린 채 맹목적인 사랑이 달가워 제멋대로 휘둘렀던 벌을 드디어 받게 되는 건가 싶었다. 솔직하지 않은 건 누군지, 속내 까내지 않는 것이 옳은지, 하나하나 재단하다간 타인이 말하는 정상 앞에서 깨질 것이 분명한 비이성적 애착.) 나는.... (널... ... 입술 꾹 물었다. 알잖아. 정세현은 이기적이다. 제가 겪은 고통은 반드시 돌려줘야만 했고, 네가 원하는 바를 언제나 이루어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엔 이유가 조금 달랐다. 대답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이 관계를, 세상이 정립한 편협한 단어들로 쉽게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이 꽃밭이고 두 사람은 이별을 도처에 두고도 사랑하며, 증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할 뿐이죠.
사랑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 최고의 난제입니다.
정세현:대답해 줘. 내 증오와 사랑, 너를 향한 모든 감정은... 고해림을 살게 할까, 죽게 할까.
고해림:나를 죽게 해. 그런데 난 본래 제대로 살아가고 있질 않았어서.
나를 죽이는 네 증오와 사랑이 좋아.
죽어가는 삶이 좋아.
너는. 살아가고 있어, 죽어가고 있어?
정세현:정말로 죽일 수 있어. 이번엔 진짜야. 끝내 널 죽이고, 똑같이 죽어버릴 수 있어. 로맨틱하지...
그래도 좋아? 내게 묶인 채 죽어버린 보잘 것 없는 삶이거나, 그 삶을 벗어날 마지막 기회가 될 텐데.
... 넌 나를 죽이고 있어. 그래서 더욱 살고 싶게 해.
고해림:정세현이 죽어버릴 수 있다니 말도 안 되잖아··· (넌 살아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말은 뱉을 수 없었다. 고해림은 죽고 죽이는 것을 아직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어서 내게 증오를 고백해줘! 너는 나를 그만 사랑하고, 나는 너를 오래 사랑할 수 있게. 우리는 그게 딱 좋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너는 나보다 더 낮은 밑바닥으로 가는 거야. 그럴 수는 없어··· 같은 곳에 같이 있자. 그냥 이렇게.
정세현:바보...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너와 같은 곳에 있으려면, 너를 증오하려면,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 겨우 너 같은 것에게 향하는 마음이 사랑이라 정의내려 나를 끌어내려야 해.
이건 증오의 고백이야, 사랑의 고백이야?
욕심 많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흐... (네게 가까이 다가가 다시금 손 뻗어 흉터를 훑는다. 다정한 투.) 관계를 정의하는 게 두려워? 떠나는 게 두렵구나. 나보다, 외로움이 더 무서워? 그 비정상적인 사랑이 널 살게 해?
고해림:내가 그렇게 밑바닥이었나. (흐리고 자조적인 미소 후에.) 내가 무서워하는 건 바다 하나밖에 없었는데. 죽음도 살인자가 되는 것도, 친구들이 다 죽어버리는 것도 겁내지 않았는데···.
(살갗에 와닿는 감각이 끔찍하게도 좋았다. 허공으로 산화한다고 생각하면 근원 모를 공허감이 쏟아졌다. 단순히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네가 망쳐놓은 나는 그래. 너 없는 삶이 무서워.
네가 헤집어놓은 내 사랑의 정의가,
나를 살게 해.
그러니까 더 이상 나를 망치지 말아줘··· 무서워하는 게 너무 많아졌어. 무슨 의미인지 알아?
용서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너를 영영 사랑할 테니까. 영원히 죄인으로 남을 테니까···.
정세현:(가만히 그 낯 바라본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말마따나, 내가, 이 사랑이, 감정이, 너를 죽이고 있다. 고해림을 향한 살의는 곧 스스로의 밑바닥을 고하는 꼴이라, 같은 외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이 요동친다. 정세현은 어쩌면 처음으로 위기를 느꼈다. 역겨움을 감출 수 없다. 절로 미간 찌푸려져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목구멍 끝부터 으릉거리듯 토악감이 몰려온다.) 그래... 넌 생각보다 훨씬, 최악이야. 늘 내 앞에선 그리도 약하게 굴어서, 그 고해림이 나를 사랑해서... (손 슬 내려 목가로 향한다. 꾸욱- 강하게 짓누르지 않아도 쉽게 파이는 근육을 손끝으로 느낀다.)
... 해림아. 내가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 (그대로 뒷목 끌어당겨 얼굴 가까이 한다. 속삭이듯 귀에 쑤셔박는다.) ... 감당할 수 있어? 네가 날 영원히 사랑할 수 있어? 겨우 나 하나 사라지는 걸로, 경멸받지 못하는 걸로 이렇게 벌벌 떨면서, 죄값 다 받을 수 있냐는 말이야. 확신이 필요해.
고해림:나는 언제나 네 앞에서 최악이지. 전에도 지금도. (너는 내 새로운 공포가 된다, 그게 전제였다. 삶을 뭉개놓은 호흡 불능도 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목을 내어준 것부터 그 증명이었다. 침잠해 숨 못 쉴까 겁 났지만 네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수백 번 바다에 빠져도 너를 잃지만 않으면 됐다. 이렇게 질척한 날것의 이기심에 속이 모조리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너와 나 사이의 악의가 기껍고 또 역했다.
창백하게 식은 손 뻗어 네 왼눈을 쓸어본다. 눈꺼풀부터 죽 내려서. 기이한 색채에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 다정한 눈동자를, 눈알을. 핥아 이로 처절하게 짓이기고 목구멍 너머로 한껏 삼켜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고해림은 마침내 이것이 회개 불가능한 죄악임을 알아챘다.) 그래. 세현아. 난 너한테 다 내어줬어. 사랑, 증명, 확신, 삶과 죽음, 내 일말의 정의까지 내다 버렸는데. 뭘 더 갖고 싶어? (느린 어조가 고해림을 이루는 것들을 나열한다. 울 것 같은 낯으로 찌푸리면서 고해림은 얕게 웃었다.) 뭐든 줄게.
정세현:(기꺼이 네 손길 받는다. 꼭,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최악이다아! 이런 거. (그대로 온 힘 다해 안았다가 떨어진다. 제 표정은, 그 누구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너를 증오해, 해림아. 이게 네가 바랐던 내 밑바닥이고. 널 너무 사랑해서, 딱 그만큼 증오해서, ... 그래서 널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일 생각이야.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 (흐흐. 그 언젠가 보았던 느른한 웃음.)
자. 나를 떠나! 네가 최고로 두려워하는, 외롭고도 안전한 그 길로 가. 내 증오도, 네 사랑도 전부 잃고 고통스럽게 죽어가.
(이것이 정세현이 말한 대가다. 전부 내어줬고, 그걸로도 모자라 뭐든 주겠다는 사람에게 딱 그 반대를 바랐다. 이기적이게, 멋대로 편해지려고 하면 안 되지... 널 살게 하는 건, 내가 네게 주는 고통이잖아.)
예언 하나 할게. 잘 기억해 둬.
네가 우리의 감정을 전부 잊더라도, 그렇게 잘 살아가는가 싶다가도... 끝없이 외로워질 거야. 두렵고, 불안하고, 어딘가 텅 빈 것처럼 서서히 망가져버릴 거야.
마지막으로, 그 죗값 전부 치루고 나면... 고해림은 다시 이 지옥에 찾아와 악몽의 굴레처럼 날 사랑하게 될 거야. 나는 그걸 속죄라고 불러.
정세현:너는 어때. 이 속죄도, 고통도, 악의도, 전부 사랑할 수 있어?
고해림:(강한 포옹 고작 그것 하나에도 삶이 바스라지는 것은 제 쪽이다. 회피하려다 또다시 네 시선 끝에 들었다. 고해림은 아주 늦은 후회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 좋은 방도는 없었던 것 같아서, 후회마저도 관뒀다. 두어 발자국 뒷걸음질쳤다. 한순간에 사라져버릴까 무서워 더 멀어지지도 못했다. 한참은 애매한 그 거리에서. 눈앞이 일그러졌고 눈물이 뚝뚝 흘렀다. 붉어진 눈가 손꿈치로 거칠게 짓무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선은 네게서 떨어지질 못했다. 네가 떠나겠다고 말한 지금에서야 고해림은 너를 제대로 마주본다. 차마 피하지 못했고 시선 더 깊게 박아넣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금에서야.)
최악이야······ 내가 언젠가 생각했던 것보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혀. 무딘 칼날이나 박아놓고서는. 오래 살아있으라고, 그렇게, (문장은 제 형태를 찾지 못했다. 손바닥이 온통 젖고 나서야 초라하게 말했다.)
···사랑해. (네가 나를 증오한다고 말하는 순간 내 영원한 사랑이 시작됐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네 영원한 증오가 끝났다. 고해림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습고 사소하고 변변찮은 말 한 마디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순응을 담았다. 더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정세현, 내가 영원히 고통에 살길 바란다면 그렇게 할게. 나는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하고, 증오할 거야. 어느 날은 보고 싶어서 죽으려고 할 거고, 어느 날은 널 원망하고 죽이지 못해 안달낼 거야. 빌어먹을, 이딴 게 네가 바라는 바라면 그렇게 해.
가버려! (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목 긁는 소리 섞여 부드럽지 못하다.) 내가 너 필요하다고, 얼마나 초라하게 말했는데, 그렇게 빌었는데,
고해림:그래서 이런 너도 받아들일게. 내가 너무 증오스러워서 이런 끝을 선물하는 너도. 그런 사랑도 받아들일게. 이게 내 답이야.
밤이 쏟아지고, 별이 드리웁니다.
두 사람의 눈에 별이 쏟아지고,
세상에 사랑이 흘러 넘치기 시작하고,
정세현과 고해림의 ■■이 쏟아지고,
흘러내리며……,
이별길을 이별강으로 만듭니다.
선택해야 할 때가 왔어요.
세계의 사랑을 훔쳐서 아무도 찾지 못할 저 밑바닥으로 영원히 도망쳐버릴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무엇 하나 느끼지 못했던 지난 사이로 돌아갈까요?
선택은 당신이 향하는 길에 달렸습니다.
결정하고 나면 되돌릴 수 없을 거예요.
곧 해가 뜨니까요.
정세현:(네 눈물을 보고 처음 든 감정은, 애석하게도 후련함이나 쾌감 따위의 짓궂은 폭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세현은 고해림을 사랑했기에, 또 증오했기에, 모든 감정 넣어둔 채 그것을 대가로 치부했다. 죗값은, 너만이 치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굳이 입밖에 내진 않았다. 너는 누구보다 고통스러워야 하니까. 어떤 손길도 그 마음 약하게 만들어선 안 되니까.)
...... 알아. 알고 있어, 해림아. 기억하고 있어. 내 뇌에, 이 몸에, 뼈저리게 새기고 있어. (그게 네 사랑에 대한 마지막 답이야. 고해림이 순응한 것처럼, 정세현도 철저히 순응했다. 언제나처럼 정세현의 예언은 들어맞을 테다. 그것이 우리의 비정상적인 사랑에 대한 죗값이다. 답을 듣고, 온전히 순응하고 나니 덤덤하게 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미련 따위 가지지도 않았다. 화한 미소로 응한다. 안녕, 고해림. 다시 만나.)
... 하하! 그래. 마지막 인사로는 사랑해가 좋아, 죽어버려-가 좋아?
고해림:잊어버리면 안 돼. 너, 내가, (악랄한 문장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틈을 뒀다.) 지옥까지 쫓아갈 거야. 너를 생각하면서 죽어갈 거야. (제 음울한 낯과 대비되는 네 웃음을 눈동자는 차근히 훑는다. 예전에는 네가 참 빛나 보였는데, 정말로 반짝이고 고결한 사람 같아 보였는데. 이제는 경외 따위의 거리감 있고 서늘한 단어들이 사라지고 다정한 증오만 남았다. 고해림은 그게 좋았다. 그래서 네 지독한 고문에도 조금 더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죽어버려. 그쪽이 좋아. 생애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 생긴 것처럼. 네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하게. 나만이 네 인생의 지옥 같은 종말점인 것처럼.
이건 이별길 같은 게 아냐... 우리 사이에 이별 같은 말은 너무 가볍고 얄팍해.
정세현:(지옥까지 쫓아갈 거야. 그 말이 맴돌았다. ... 봐, 넌 다시... 이 지옥에 찾아올 거라니까. 벌써부터, 꼭...... 한 발자국 멀어진다. 너와는 다른 길에 서서, 마지막 말을 건넨다. 사랑해. 증오해.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 두 감정을 전부 먹어치우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