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nture Time - BMO
BEFORE YOU EXIT

TRPG

[비극] 비정상적 사랑 재활용 가이드

1975°F 2024. 2. 23. 17:40

관오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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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게 닫아놓은 커튼 사이로 햇빛이 기어듭니다.
 
고해림의 눈을 괴롭히는 것이, 빨리 일어나라며 재촉하는 것만 같습니다.
 
몇 번 태양을 피해보려고 하기도 하지만... 기어이 깨우려고 작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집요하네요.
 
어쩔 수 없이 눈을 뜨고 거실로 나오면,
 
소파에 잠들어 있는 정세현이 보입니다.
 
전날 대뜸 찾아와 제 고민 들어달라며 궁시렁댔더랬죠.
 
그보다, 저렇게 한가로이 누워 있을 인물이던가요?
 
너무 늦으면 식사 시간을 놓칠 수도 있고, 또 오늘 정세현은 중요한 일정이 있다고 했는데요.
 
연예인에게 중요하지 않은 일정이 어디 있겠냐만은.
 
보아하니 팬미팅이라도 있는 모양이죠.
 
정세현은 꼭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입니다.
 
무슨 꿈을 꾸는지 살짝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네요.
 
고해림:(이마 쿡쿡 찔러봄...) 바쁘신 분이 왜 여태 이러고 있지. 일어나.
 
그렇게 정세현을 깨우면 몇 번 뒤척이던 그가 천천히 눈을 뜹니다.
 
졸음을 떨쳐내려는 듯 온순하게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던 정세현이, 천천히 입을 엽니다.
 
막 일어나 다소 낮고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는 말은,
 
정세현:흐... 사랑해, 해림아.
 
……귀를 의심할 소리입니다.
 
고해림:
SAN Roll
기준치: 40/20/8
굴림: 42
판정결과: 실패
정세현... 잠 덜 깼어?
 
▶:이성 -1
 
정세현:그래 보여?... (쩝.)
 
그도 그럴 게, 잠결에 한 소리라고 치부하기엔 이미 졸음이 다 가셨다는 것처럼 또렷한 눈을 하고 있는 걸요.
 
그대로 손 뻗어 고해림의 눈가 흉터를 한 번 매만진 정세현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립니다.
 
이렇게 순수한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사랑을 고하던 날이 있었을까요.
 
있었다 하더라도 고통인지 증오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의 결과물이었을 텝니다.
 
정세현은 고해림에게 언제나 지옥 같던 감정만을 전하지 않았나요.
 
그 안에 들어있던 감정이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만이 명백했습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정세현은 다시 한 번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입니다.
 
정세현:내가 널 사랑하는 게, 별로야?
 
고해림:무, 무슨 소리야. 요즘 많이 힘들어? 애가 왜 이러지. (깜빡인다...)
...넌 그러면 안 되잖아...
 
정세현:왜... 좋지 않아? 누군갈 사랑하지도 못하는 놈이 네 앞에서 애정 갈구하고, 진심으로 웃어주고... 이런 밑바닥이 보고 싶은 거였잖아... (툭, 네 어깨에 고개 묻곤 대답할 새도 없이 중얼거린다. 다소 강압적으로.)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죽여버린다고 해도 난 너를 사랑할 거야.
드디어 제대로 알아버렸거든... 우리를 옭아맨 이 감정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내 영은, 영원히 너에게만 내어줘야 한다는 걸. 그게 '인간' 정세현의 운명이라고...
 
정세현은 그 입술로 사랑을, 운명을 입에 머금습니다.
 
몇 시간 전만 하더라도 한 생애도 아닌 한 순간의 곁만 허락했던 이의 입에서 영원이 쏟아져나오다니요.
 
철벽 같은 댐은 구멍 하나가 뚫리면 삽시간에 무너져버린다고 하던가요.
 
손가락으로, 손으로, 몸으로 댐을 막던 소년의 이야기는 허구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처럼 정세현의 마음은 온통 감정이 터진 듯이 무너진 댐처럼 굴고 있습니다.
 
고해림:너만은 날 사랑한다고 말하면 안 되지. 완전히 틀렸어. 넌 날 혐오해. 세현아. (온기 한참을 가만히 받아들이다 억지로 팔 움직인다. 네 어깨 꾸욱 밀었다. 유약하게 굴 듯이 위태로이 눈동자는 흔들리지만 마주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놀리고 나갈 준비나 해. 스케줄 있다며. 내가 놀아나는 게 재밌지, 아주.
 
정세현:그럼 널 너무 혐오한 나머지 네가 없으면 안 되는 몸이 된 모양이지. 남들은 이것도 사랑으로 치부하던데. 너만... (너만... 그걸 부정하고 있잖아. 제 눈 한 번 마주하지 않는 얼굴 지그시 바라보다 슬 입꼬리 올리며 TV를 틀었다. 나갈 생각이 없는 양.) 정정할게. 네가 재밌어. 좋아해. (큭큭.)
 
고해림:(갈무리하고 미심쩍은 낯으로 옆에 앉았다. 답잖게 소파에 기대어 늘어진다. 중얼였다.) 멍청이... (애써 너 그만 신경쓰려는 티 난다. TV 멍하니 바라본다.)
 
화제 전환하듯 켜진 TV에선 흔한 가십거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유독 유명인들의 결별 소식이 많이 나오고 있네요.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던 한 부부도 이혼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유독 매니아들이 수집하는 물건들이 많이 버려지거나 기하급수적으로 중고 마켓에 올라오고 있다는 사소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문 앞에서는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고해림:
지능
기준치: 65/32/13
굴림: 66
판정결과: 실패
 
확실히 오늘의 정세현은 이상합니다.
 
그건 부정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정말 부정적이기만 한 걸까요?
 
어쩌면... ... 혐오하는 것 이상의 진실을,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지려는 순간, 계속해서 울리는 정세현의 핸드폰에 정신이 번쩍 듭니다.
 
고해림:(깜짝...) 늦은 거 아냐? 너. 자꾸 그러다 초심 잃었다고 욕 먹는다...
 
그래요. 이보다 더 밍기적거리다간 분명히 저 뉴스 화면에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올지도 모른다구요.
 
중요한 일정이잖아요.
 
정세현이 원래 사랑하던 일을, 사랑하던 자신을 만들어내는 날.
 
누구도 끼어들지 못하는, 정세현만의 세계라 생각을 하니 묘한 불쾌감이 올라옵니다.
 
정세현:초심 안 잃어도 욕 먹어. 안 갈래. 알게 뭐야... 이제 그 쓰레기 같은 사랑들 안 받아도 돼. (눈 휘어접어 웃으며 붙었다.) 나 갔으면 좋겠어?
 
고해림:(고개 돌려 본다...) 왜?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좋아했잖아. (잠시 뜸 들인다. 틈 두다가 야트막하게 문장 나왔다.) ...그건 아닌데.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갈 거야?
정말로?
 
정세현:... 그딴 건 사랑도 아니야. 말했잖아.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됐다고. (이어지는 문장에 흐흥... 웃음 흘렸다. 꼭,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답지 않게 부드러운 시선 따른다. 그래... 넌 나보다, 지독한 외로움을 더 싫어하잖아.)
옆에 있을게.
네가 바란다면.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것들에 흥미를 잃은 듯 다시금 당신을 향해 팔을 뻗습니다.
 
그 눈은 순종을 머금고 있습니다.
 
... '그' 정세현에게 순종이라니요.
 
세상이 망하고도 열 번은 더 망했을 법합니다.
 
커튼 사이로는 여즉 눈치 없는 햇살이 쏟아지고,
 
그 햇살은 여전히 우리를 비추고 있으며,
 
지독하게 눈이 부시고,
 
심장이 아파오고,
 
머리가 아득해지고,
 
유독 정세현의 체향이 깊게 밀려든다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버틸 수 없는 수마로 빠져듭니다.
 
고해림을 호명하는 정세현의 목소리가 울렁거려 진실인지 거짓인지, 그조차 모르겠어요…….
 
고해림: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45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정세현:... 잊으면 안 돼.
 
아득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
 
그건 착각일까요. 아니면 진실일까요.
 
그 또한 아니라면…….
 
눈을 뜹니다.
 
고해림은 꿈 속에 있습니다.
 
모를 수가 없는 것이, 사방에 본 적도 없는 꽃이 피어 있는걸요.
 
그리고 성스러운 듯한, 하지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가 근원지도 모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섬기면 이런 기분일까요.
 
누군가의 숭배를 받고 이루 말 할 수 없는 권능을 지니게 된다면 이토록 성스러운 곳에서 홀로 남겨지게 되는 걸까요.
 
하지만 당신은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의 주인공은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요.
 
고해림:
관찰력
기준치: 70/35/14
굴림: 5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여름의 열기에 의해 일그러지는 아스팔트처럼 누군가의 인영이 흐릿하게 당신의 곁에 서있습니다.
 
인간일까요?
 
인간이라면 꼭 정세현을 닮은 것도 같습니다.
 
눈을 찌푸려 보아도, 손을 뻗어도 그것은 잡히지도 흩어지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무슨 행위를 하건 웃어버릴 뿐입니다.
 
웃음 소리는 분명히……, 그 누구의 목소리와도 닮지 않았습니다.
 
고해림:
SAN Roll
기준치: 39/19/7
굴림: 92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네가 좋아할 모습으로 왔어. 하지만 네가 나를 보면 돌아갈 수 없을 테니 눈을 약간 가렸지.
 
아무 꽃이나 뜯어서 꽃잎점을 한 번 봐.
 
주제는… 정세현이 너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
 
사랑한다로 시작할지 사랑하지 않는다로 시작할지는 네가 선택해.
 
생뚱맞은 제안입니다.
 
명령조로 들려서 그리 유쾌하게 느껴지지도 않네요.
 
고해림:(누구인지 물을까 했지만 관둔다. 닮은 모습에 한참 넋 놓고 보다 꽃 하나 꺾어 쥐었다.) ...사랑하지 않는다. (꽃잎이 하나 툭, 떨어진다. 이어 느릿이 하나씩 떼어냈다.)
 
고해림이 꽃잎을 한 잎씩 뜯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사람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읊습니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
 
사랑하지 않는다.
 
마지막 꽃잎이 뜯겨 바닥으로 추락합니다.
 
그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예전부터 알고 있던 명제였습니다.
 
고해림:...바보 같은 짓을. (느직한 한숨.)
 
어떤가요. 후련한가요? 바라왔던 감정이라?
 
고해림:(속이 울렁댔다. 기이하고 편안한 꿈속이라도 감정은 변화 없이 넘실댄다. 심장에 와닿는 익숙한 통각을 씹어넘겼다.)
 
그냥 꽃점이라고 치부해버리면 간단하겠지만 이곳에는 그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아요.
 
아무 이유도, 생각도 필요 없는 상황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그 순간, 근원지도 모르게 아무것도 없는 꽃에서 꽃잎 하나가 더 피어오릅니다.
 
사랑한다.
 
마지막으로 말을 맺은 그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립니다.
 
그에게 뭔가를 물어보면 대답해줄까요?
 
고해림:(꽃잎이 피어오르는 순간 화들짝 놀란다. 꽃을 떨어뜨렸다. 불유쾌하게 바라본다.) 당신이 했어? ...그리고 여긴 어디인지. 그저 꿈일 뿐이라고 해줘...
 
글쎄... 주어는?
 
우선, 여기는 그 어느 곳도 아니야.
 
존재하지 않는 곳. 영혼이 떠나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
 
이름도 없으며 존재조차 불투명한 허구의 공간이라고 설명합니다.
 
덧붙이는 말은,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그렇게 생각해도 돼.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고차원의 개념이라 설명하기 어려우니까.
 
고해림:정세현의 애정, 그 애의 착각, 마지막 꽃잎, 날 여기로 이끈 것. 모두.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내 간섭이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은 너와 나의 계약, 그리고 조잡한 재능과 조악한 취미를 지닌 한 신의 합작이라고 볼 수 있지.
 
... 이 중에서 가장 큰 건 너의 욕망이었다는 걸 잊은 모양이지만.
 
고해림:(눈가 찌푸리더니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선다.) 무슨 계약. 내가 잊은 게 있나?
 
글쎄. 그건 스스로 느끼는 것이 좋을 텐데.
 
내가 너를 여기 부른 궁극적인 이유는, 너의 이 은총은 일회용품에 불과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다.
 
나는 존재 가치에 따라 세계의 오류를 수정할 의무가 있고, 오늘이 가면 다시 널 찾아갈 테니.
 
고해림:전혀 못 알아듣겠어... (여기저기 흩어진 듯한 단어들 머릿속에 주워담는다.)
 
이것만 기억해. 네 욕망에 따라, 너로 인해 정세현에게 발생한 오류가, 세계의 균형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
 
그 은총을 통해 감정을 확실히 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
 
무언갈 더 묻기도 전에 그가 다시 돌아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세계에 간섭하고 있는 하나의 시스템.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잘 즐기고 잘 생각해. 난 교활한 신보다는 무력한 규율 아래의 존재들을 더 사랑하니까.
 
그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눈을 보호하지 않고 물에 잠긴 것처럼 사방이 어룽지다가, 다시 암전됩니다.
 
...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이 팔뚝을 스치고 지나갑니다.
 
추위를 많이 탄다면 오소소 소름이 돋을지도 모르겠네요.
 
추위를 느끼고 나서야 시야가 트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당신은 이미 현실 세계로 돌아와 있습니다.
 
이곳은... 기차입니다.
 
... 기차?
 
왜 갑자기 여기에 실려 있는 거죠?
 
당신은 몸을 기울여 누군가의 어깨를 베개 삼아 기대고 있던 모양입니다.
 
누군가라고 해봐야 뻔한 이야기입니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내어주고 바깥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은……, 정세현입니다.
 
밖은 벌써부터 노을이 뉘엿뉘엿 지면서 창 너머로 오렌지색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의 눈으로 오렌지색 빛이 쏟아집니다.
 
그 차갑고, 또 지독하리만치 뜨겁던 눈동자가 일순 아름다운 노을빛으로 보여요.
 
눈을 가만히 깜박이던 정세현이 당신의 움직임을 눈치 챈 것인지 고개를 돌립니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느긋한 목소리로 무어라 속삭입니다.
 
고해림: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65
판정결과: 실패
 
……너에게 이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어.
 
웅얼거리는 말의 끝만 들려옵니다.
 
흡사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듯 다정하고 안온한 투네요.
 
미묘하게 다정한 온도를 지닌 목소리,
 
두 사람에게 뜨겁지 않을 정도로만 내려앉는 태양,
 
약간의 더위가 숨을 내쉬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기차 안의 에어컨.
 
두 사람은 옛날 영화의 엔딩 크레딧 속 주인공 같습니다.
 
우리가 겪은 비정상적인 애착이 아닌, 그저 평범하고 다정한 애정을 속삭이는……,
 
막연한 착각을 일으키기 좋은 시간이네요.
 
잠깐. …… 벌써 노을이 진다고요?
 
우리는 방금 침대에서 아침을 맞고 있었잖아요.
 
이변을 느낀 고해림,
 
고해림:
SAN Roll
기준치: 38/19/7
굴림: 26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감소 없음
 
꽃잎점을 본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 정도의 시간을 소모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 반응을 보던 정세현은 의아함을 느낀 듯 고개를 기울입니다.
 
정세현:잠이 덜 깼어?
 
고해림:여기... 어디야? (멍하니 창 밖 본다. 그리고 황금빛 어린 네 눈동자도 스치듯이.)
 
정세현:... 아주 푹~ 잤나 보네. 으응? (큭큭.) 나랑 같이 나와주기로 했으면서!
 
그는 품에 있던 작은 수첩을 꺼내어 건넵니다.
 
정세현이 일기를…?
 
제 속내 하나 밖으로 내비치기 싫어하는 그가 들킬지도 모르는 흔적을 남겨두었던가요?
 
고해림:
관찰력
기준치: 70/35/14
굴림: 2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손에 들어보니 물에라도 한 번 담갔다가 꺼낸 것처럼 이리저리 주름이 지고 어그러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 안에는 이것저것을 스크랩이라도 해 둔 것처럼 여러 장의 종이가 겹쳐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사용한 것인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아요.
 
잠시 고해림을 바라보던 그가 수첩에 손을 옮겨 어떤 페이지를 펼칩니다.
 
한 번 물에 젖어서 찢어진 걸 붙인 건지 구깃구깃하고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상태예요.
 
고해림:
자료조사
기준치: 70/35/14
굴림: 39
판정결과: 보통 성공
 
【 영원히 노을이 지는 이내길, 시간이 흐르면서 멈추고 있는 이곳에서 너와 마지막 하루를 보낼게. 】
 
노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 티켓 같네요.
 
그러고 보니 한 5년 정도 전에 흥행에 실패한 이내길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만들어진 이내길이라는 버츄얼 리얼리티 관광지가 개발되고 엄청나게 흥행했다는 걸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버츄얼 리얼리티 관광지(VRT).
 
4D 체험을 조금 더 발전 시킨 것으로 인간의 정신 자체를 가상 세계로 소환하여 하나의 세계를 구현하는 시스템입니다.
 
두 사람은 이 VRT를 보러 온 모양입니다.
 
어지간한 부자도 한 번 정도 온 게 다라고 할 정도의 금액인데요.
 
정세현은 담담하게 입을 엽니다.
 
정세현:나, 그 영화 봤었거든~. 낮이 없는 세계. 노을과 밤밖에 없는. 자세한 내용은 기억 안 나고 노을이 지는 것만 어렴풋하게 생각나는데, ... 그 노을을 잊을 수가 없어서.
흐... 사랑하는 사람과 오고 싶었어. 영화의 결말까지 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 네가 응해줄진 몰라서 아침에 일단 예약부터 했지만.
 
고해림:(사랑 얘기 나오자 몸 움찔한다. 고개 일으키고 창 밖에서 네게 쏟는 노을 훑는다.) 예쁘네. (건조한 감상. 그러나 여태의 질척이고 어두운 불순물 같은 감정에 섞여든 이 아름다운 풍광은 마음 약해지게 하기에 아주 좋았다.) 그만하면 안 돼? 이제. 재미 없다고... 사랑 놀이.
...너 일부러 이러지. 내가 너한테 어떤 마음으로 고백했는지, 다, 알고 이러는 거지... 나 아프라고.
 
정세현:(그럼에도 네게 시선 떼지 않았다. 열렬한 애정. 순수한 사랑. 제게 어울리는 단어는 무엇 하나 없었음에도 정세현은 이를 사랑이라고 불렀다. 되려 네 언어 하나하나에 상처라도 받은 양 늘 샐쭉 웃던 입꼬리 내려가고 만다.) ... ...
사랑해. 좋아해. 해림아. 내가 네게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까. 나 이기적인 거 알고 있잖아. 너야말로, ... 일부러 이러지. 그동안 너 힘들게 한 거 갚기라도 하려고. (형형한 눈동자 마주하며 네 양팔 붙잡았다. 여전히 강압적이다.) 사랑한다며... 내 밑바닥이 보고 싶다며. 네가 여기까지 끌어내렸잖아. 네가 날 망가뜨렸잖아... 네게 하는 말들, 행동, 이 모든 순간이, 씹... 전부 아무 의미 없는 거짓말과 같다고 말하는 거야? 나는 또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고해림:정상이 아냐, 항상 그랬지만, 나는 이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지도 못하겠어. (창밖으로 흘러가던 눈동자는 붙잡은 너로 인해 네게로 돌아왔다.) 그래, 내가 너를 망쳤어! 정말로 죽여버리고 싶었거든. 네가 내 심장을 헤집었잖아. 그 대단하신 프라이드로. 너한테만은 다정하게 굴고 싶지 않아. 이게 네 밑바닥이라면, (고개 숙인다. 미적지근한 온도의 날숨이 둘 사이의 거리를 채웠다.) 너는 나보다 더 엉망진창이야... (수없는 죄책이 뒷목을 내리누른다, 그것은 곧 온몸에 스며 한없이 가라앉을 것 같은 기분을 자아냈다.)
내, 내가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빌었는데, 너는, 들어줄 것처럼 굴어놓고선. 결국 이렇게 다시 한 번 더 나를 끌어내려... (얼굴 약간 일그러뜨린다. 울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웃는 것 같기도 했다.) 증오한다고. 세현아. 나는 널 그만 사랑할래. (낮은 음조가 불가능한 희망을 뱉었다.) 그러니까 너도 그냥 거짓말이라고 해줘. 사랑 같은 거. 그저 나를 갖고 논 거라고. 진실이 아니었다고.
 
정세현:... 하! 뭐가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따지는 건 진즉 그만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좋았잖아. 혐오하고, 사랑하고, 또 지독한 온기가 좋아서 상처받고. 정세현 딴에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더랬다. 처음으로, 이토록 순수한 애정을. 그 감정이 부정당할 때의 기분, 넌 절대 모를 거야...) ...... (억세게 팔 붙들던 손 하나가 네 뺨으로 향한다. 습관처럼 흉을 찾는다. 깨끗하고 부드러운 살결 새로 불규칙하게 난 상처를 더듬고 나면, 또 다시 순응하고 만다.) ... 알아. 엉망진창이야.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역겨워. 난 지금... 내가 혐오하던 딱, 그 모습이라고. (시인했다. 나도 인간이야.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알고. 그 감정이 무엇이든, 표현할 줄 알고.)
그러니 너도 더욱 망가져야지. 해림아... 지금 나만큼 고통스러운 거잖아. 날 사랑하지 않은 적 없으면서, 사랑이나 혐오보다 외로움을 더 싫어하면서. (끝까지 네가 원하는 대답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늘 서로의 기억에 최악을 새긴다.) ...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직접 겪고 확인해. 그러니까 지금은, 옆에만 있어. 회피하게 두지는 않을 테니.
 
고해림:그랬겠지. 너랑 있을 때만은 그따위 거, 신경쓰지 않았으니까. (그 누구보다 올곧은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 내가 네 앞에서만은 항상 엇나갔으니까. 한여름 청춘 사춘기의 일탈보다는 무겁고 내장 헤집는 살인보다는 가볍다. 네가 차근히 오래도록 건네준 생채기를 하나하나 전부 그러모으면 내 심장을 짓물러 죽일 수도 있다. 고작 스스로가 덜 괴롭기 위해 상대의 감정을 부정하는 기분이란, 사실 그 부정에서 기인한 죄책을 견디는 게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고해림은 눈을 가렸다. 몸속 깊은 곳에 틀어박힌 타성이 네게는 물러졌다. 눈가에 닿아오는 손길에 움츠러들기보다는 이제 지독한 안정감을 느낀다. 힘겹게 시선은 네 흉터로. 가지런하지만 당시의 두려움으로 조금은 굴곡진 붉은 자국이 꼭 증명 같다. 어느새 차게 식은 손으로 네 목을 감싼다. 어느 겨울날의 섬 바닷가처럼 차가운 손으로. 적당한 힘으로 쥐고 네 맥이 뛰는 간격에 제 숨소리를 맞춘다. 차마 더 강하게 쥐어낼 자신이 없다.) 네가 바란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네 애정보다 더 구원한 습관. 고해림은 고개 숙여 긍정할 수밖에 없다, 네 요구라면 무엇이든. 손 떨어뜨린다. 제 흉터를 한 번 훑어봤다. 네게 닿아있지 않아도 꼭 그런 것처럼, 습기 가득한 유대감 따윌 느꼈다.)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33
 
정세현:(그 언젠가부터 익숙해진 대답. 그간의 정세현에겐 간절함도, 불안도, 어떤 변수도 없이 반복됐을 혐오에 점철된 애정. 고해림에게 특별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언제나와 같은 네 모습을 보고 화한 쾌감이 아닌 안도감을 느낀다. 변한 건 오직 자신이다. 이런 모습까지 받아주는 너를 보고, 지독한 유대감을 느끼는 비이성적 관계를 사랑이 아니면 무어라 정의할 셈인가.) 봐... 너도 망가졌고, (날 사랑하고 있다니까. 혐오하는 딱 그만큼, 고통스러울 정도로. 같은 감정을 공유한다는 확신이 든 순간, 해줄 말은 많지 않았다.) 정말 같아졌네... 우리. 같은 생각, 같은 마음, 전부 다... (그제야 입가에 미소 번진다. 이어지는 말은 방금 있던 일이 허상이라도 되는 양 일상적이기 그지 없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 VRT에 대한 이야기, 내가 그 영화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부러 말을 돌린 것 같기도 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고해림은 아침에 일어나 정세현이 그 자리에서 바로 충동적으로 예약한 호텔의 VRT를 선뜻 응해줬고 그와 함께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이 VRT는 영화의 전부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구매자가 희망하는 몇몇 컷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곳은 총 세 번째 컷입니다.
 
기차의 창밖을 바라보면 같은 풍경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물론... 고해림은 본 적이 없는 영화니 그곳에 정말 기차를 타는 장면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죠.
 
사실 어떠한 경위로 여기로 오게 된 건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걸요.
 
정세현은 그런 것 정도는 전혀 괘념치 않아하는 것 같지만요.
 
그 이후론, 이상할 정도로 당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습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것처럼.
 
그렇게 한참 쏟아지는 노을빛을 뺨으로 맞고만 있을 뿐입니다.
 
이상하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에 정세현이 돌아봅니다.
 
정세현:해림아. 사랑은 인간을 살게 할까, 죽게 할까?
 
그와 동시에 노을과 평화로운 길이 반복되던 창에 일그러진 글자가 떠오릅니다.
 
일레귤러 러브 리사이클링?
 
이런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영화가 개봉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 없어요.
 
정세현의 표정을 살피면 그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태연한 낯입니다. 당신에게만 보이는 모양이에요.
 
노이즈가 가득한 글자가 얼마 안 가 일그러지더니 다른 글자가 입력됩니다.
 
일전의 시스템을 운운하던 글자는 컴퓨터 화면에서 입력된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누군가가 직접 휘갈겨 쓴 것 같은 엉망인 글자로 바뀝니다.
 
영어 글자는 반쯤 사라지다 말았는데 얼마나 급했으면 위를 엉망으로 덧그리며 꾹꾹 눌러쓴 것 같습니다.
 
고해림:(알 수 없는 내용에 눈 찌푸린다. 호흡 가다듬고 글 차분히 읽어본다...)
 
아무리 열심히 읽어보려고 해도 가려진 네 글자는 읽을 수 없습니다.
 
대체 무슨 법칙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대체 그 말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알려주려고 하는 걸까요.
 
애초에 목적성이 있는 말이었을까요?
 
고해림:
SAN Roll
기준치: 38/19/7
굴림: 2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1
 
그리고 거짓말처럼 기차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일부러 우리를 내리게 하려는 것처럼, 이곳에 타고 있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둘을 해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세현도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정세현:내리자. 씬이 바뀔 때가 되어서일 수도 있고 내가 영화를 다 기억하지 못해서일 수도 있어. 아니면 버그일 수도 있고... 아무튼, 위험하니까.
 
고해림:(정신 차리고 느리게 한 번 끄덕인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거, 최악이야... 누가 이런 쓰레기 같은 걸 돈 주고 한다고. (짧게 비죽이고 움직였다.)
 
두 사람이 기차에서 내리자 그것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두 사람을 떠나버렸습니다.
 
마치 두 사람을 내려두는 것이 유일한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원래 내릴 생각이긴 했지만 이러니까 미묘하게 버림이라도 받은 기분이네요.
 
고해림:
지능
기준치: 65/32/13
굴림: 4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까 그 말들을 추측하려고 해도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단 하나, 일레귤러 러브라는 말 하나만큼은 뭘 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고해림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정세현의 감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면, ... 애초부터 우리를 가리키는 걸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든, 그것은 분명히 비정상적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재활용한다는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그 법칙은 정말로 금시초문이네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이라는 게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늦여름의 아득한 향이 코를 파고듭니다.
 
늦여름 노을은 꼭 바싹 마른 양피지에 코를 묻은 것 같은 향이 나죠.
 
눈을 감으면 머리가 아찔해지고, 그러다가도 현기증에 억지로 고개를 들고 나면 아주 아득한 시절에서나 느꼈을 거 같은 아득한 기분에 잠기는 향.
 
이내길을 본 적은 없었지만 아무튼 현대 과학은 대단하네요.
 
이런 기분까지 조작할 수 있다뇨.
 
분위기에 휩쓸리는 걸지도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는 잠시 당신의 손을 잡습니다.
 
아, 한 가지 잊어버릴 뻔했어요.
 
원래 사랑하는 쪽은, 그 고통을 감내하는 쪽은 당신이었죠.
 
손에 트로피 대신 당신의 손을, 눈에는 노을 대신 당신을 담은 정세현의 표정은 아주 오랜 시간 연모한 이를 보는 것처럼 애틋하고, 또한 열렬합니다.
 
역겹기도, 기이하기도 해요.
 
정세현:아직 나갈 순 없는 모양인데, 오빠 믿지? (흐흥. 그제야 장난기 섞인 투.) 이 다음은~ 숲 옆의 호텔이야. 가자.
 
고해림:(일부러 헛구역질 몇 번 한다.) 이딴 걸 정말 돈주고 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하...) 가자. 앞으론 이런 데에 거액 기부하고 다니지 마.
 
정세현:기꺼이 함께해주는 것치곤 입이 험하네... 앙탈은. (부러 잡은 손 흔들며.) 해림이는 부자 싫어? 다들 좋아하잖아. 아니... 날 좋아하는 건가. (돈 많고, 인기 많고, 잘생기고, 어쩌고... 실실 웃으며 하는 얘기는 가관이다.)
 
고해림:(힘없이 흔들... 흐느적거린다...) 어. 나 부자 싫고, 너무 토나오고, 네 돈도안보고얼굴도안보고어쩌고저쩌고안보고그냥좋아해됐어? 이제호텔도착할때까지말걸지말아주라.
 
정세현:응. 좋아해. (큭큭.)
 
그는 그저, 해사한 얼굴로 웃습니다.
 
저 눈은 꼭, 여지껏 정세현을 연모하던 팬들의 눈을 본따기라도 한 것 같은 눈빛이라……,
 
일레귤러 러브라는 것이 어떤 건지 바로 알 수 있겠네요.
 
아득하던 여름의 향이 순간적으로 숨이 막힙니다.
 
코앞에 있는 정세현이, 과연 고해림이 알고 있는 그가 맞을까요.
 
자신을 이토록 열렬하게, 격렬하게, 환희에 차서, 흡사 자신의 영혼이라도 내어준 것처럼 사랑하고 맹목적으로 구는 이가 과연 당신이 혐오하고 사랑하던 그가 맞을까요.
 
정세현의 눈은 오랜만에 빛납니다.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입니다.
 
그의 두 눈은 역겨울 정도로 절절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로 인해 숨 쉬고, 네 덕에 행복한 생을 지속하며, 이러한 사랑이라도 괜찮다고.
 
그가 고해림의 손을 잡고 먼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데,
 
그의 등 위로 아까 보았던 기계적인 글자가 떠오릅니다.
 
그 여러 개의 문장은 올가미처럼 정세현의 목을 휘감고 돌고 있습니다.
 
정세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고 있고, 그 행동에는 어떠한 두려움이나 고통도 없습니다.
 
글자는 멈추지 않고 점점 틈을 좁히더니 이번에는 정세현의 목을 단단히 휘감고 누르다가 떠나버립니다.
 
그도 이번에는 뭔가를 느낀 듯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눈을 한 번 깜박, 하고 나니 글자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습니다.
 
정세현:(제 목 한 번 더듬어본다.) 뭐지? 방금 숨이, ...
 
고해림:괘, 괜찮아? 방금 네 목에 글자가 떴는데...
 
정세현:... 글자? 오류인가? 거액 주고 들어온 것치곤 퀄리티가 별로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눈빛입니다.
 
……잠시만, 정세현 목덜미에 저건 뭐죠?
 
고해림:
관찰력
기준치: 70/35/14
굴림: 3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정세현의 목에 감정 파일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습니다.
 
흡사 도장이라도 찍어둔 것처럼 희미하지만 제대로 모든 글자가 드러나 있네요.
 
하지만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본인이 모르니 무어라 말 얹기도 그렇고... 일단은 호텔에 마저 가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고해림:(유심히 바라보다 떨떠름한 낯으로 시선 거둔다.) ...어디 아프면 바로 얘기해.
 
정세현:(도착할 때까지 말 걸지 말라면서... 할 말 다 하고 있잖아. 샐쭉 웃는 낯으로 고개 끄덕였다.)
 
고해림:oO(아맞다..................... 하................) ...가. 얼른. 더 빨리 걸어. 뭐해? 대답은 하지 마.
 
정세현:웅. (대답인지 앙탈인지 모를 소리나 툭 뱉곤 히죽히죽.)
 
두 사람은 어느새 숲길로 접어듭니다.
 
숲에서는 코끝을 아스라하게 스쳐가는 향이 맴돕니다.
 
풀내음이라고 하는 그것은 반딧불이가 빛을 나눠주는 것처럼 이리로, 저리로, 흘렀다가 날았다가 사라집니다.
 
두 사람의 발밑에서는 노을과 밤이슬을 머금은 나뭇잎이 나긋하게 밟힙니다.
 
어느새 밤입니다. 별이 떴습니다.
 
평화롭게 서로의 별을 찾는 것도 좋겠지만 하늘에는 보란 듯이 글자가 떠올라 있습니다.
 
■■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밤길을 누군가가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고해림:(멍하니 읽는다... 단순 시스템 오류는 아닌 것 같은데.)
 
두 사람의 시간을 하나하나 뜯어보고, 그것의 오류를 찾아내어 수정하려고 합니다.
 
대체 무슨 법칙인지는 모르겠으나 정말로 성가시네요.
 
이 세계가 몇 개의 법칙으로 유지가 되는지 어떤 시스템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지금껏 그런 것을 모르고도 잘 살아오지 않았나요?
 
여러 생각을 하는데 문득 그가 해림아, 하고 당신을 부릅니다.
 
정세현:나는 네가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하면 바로 사라져 줄 수 있다고, 방금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건 역시 너무 과분하겠지?
널 사랑하지만.
 
말을 마친 그가 잠시 웃으며 당신을 돌아봅니다.
 
그 웃음은 여름밤을 꼭 닮아 있었고 이 숲을 모방한 듯 아득하게, 아스라하게 희미합니다.
 
아. 모두의 우상,
 
사랑인지 증오인지 알 수 없는 열감,
 
한없이 높은 곳에 올라있던 그와 입을 맞춰 이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면…
 
그제야 진실로 바라는 우리가 될 것만 같습니다.
 
어쩐지, 그 더럽혀진 입술엔 숲의 향기가 날 거 같아요.
 
일순, 그에게 입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해림:
정신
기준치: 40/20/8
굴림: 3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순간 입 밖으로 달뜬 욕망을 뱉어낸다. 무미건조하고 서느렇고, 다정하게.) 사실 가끔 생각해. (네 목 잡아 끌어온다. 제 쪽으로.) 그때 내가 손을 떨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깊게 그었다면 네 눈을 아예 못 쓰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단순히 입 맞췄다. 고개 기울여 조금 파고들다가 말 잇는다.) 나는 왜 항상 네 앞에서 내 욕망을 눌러야만 했는지 의문이 들어...
 
정세현:...... (그 모든 행동 가만히 받아들였다. 짧은 순간 입에 닿은 온기는, 눈만 쓰지 못했다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 달가운 유흥거리로 느꼈을 정도의 익숙함이라. 이어지는 말에 차라리 그렇게 만들지 그랬어... 속으로 대꾸하고 만다. 짧게나마 경애와 순종을 표하던 눈의 빛이 사그라든다.) 네가 날... 사랑해서 그래. 사랑하는 만큼 증오해서 그래. 그 욕망 전부 보이면, 넌 언제까지나 내게 지기만 할 테고, 그게 분하고, 그럼에도 후련히 날 놓아줄 수도 없어서... ... 아쉽다고 생각했지. 미련도 사랑이니까. (제쪽에서 네 이마에 짧게 입술 맞댄다. 그리고 떨어졌다.) 봐. 또 네가 졌잖아.
 
고해림:(중독된 것처럼 굴었다. 잠깐 정신 차리면 밀어냈다가 끝내는 다시 옆에 있을 수밖에 없어서. 고해림은 그게 싫었다. 그런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정말 싫었다. 삶에서 멋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많았으나 너만한 깊이는 처음이라 미숙해서, 져버리고 만다.) 나 정말로 다 망쳤어, 너 때문에. 고작 너 하나 증오하고, 사랑하느라. (이제는 나에 대한 희미한 확신조차 안 들어. 그걸 직감하게 돼. 손꿈치로 이마 얕게 쓸었다. 엷은 소리로 불만 토해내다가 걸음 다시 바로 한다. 가볍게 농담한다. 비아냥.) 1군 아이돌이나 되어서 동급생 여자애 하나 이겨먹으니까 좋아?
 
정세현:... 좋은데? 그냥 동급생 여자애 하나가 아니라, 고해림이라서. 다른 누구도 아닌 널 이 정도로 망가뜨릴 수 있어서. ... 너도 그래서 날 좋아하는 거잖아. (고작 일찍 사회 나간 동급생 남자애 하나 끌어내리려고.) 그래도, 오늘만큼은 무승부야. 그게 사랑의 증거고.
 
밤길의 숲 속을 걷다 보니, 어느새 시야가 밝아집니다.
 
인공적인 빛이 두 사람의 시야를 파고듭니다.
 
아, 그 사이에 호텔에 도착했군요.
 
숲 속의 호텔, 이곳은 이내길의 주인공인 성현과 지연이 하룻밤을 머물고 간 곳이라고 하죠.
 
숲 속에 있길래 아담한 펜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번쩍번쩍하게 빛나는 것만 봐도 호텔이네요.
 
정세현은 영화 속 이야기를 하며 고해림을 방으로 안내합니다.
 
주인공 두 사람이 이곳의 불빛을 보고 숲을 찾으러 왔고,
 
그 둘이 머물렀던 호수는 404호실이라고 하네요.
 
꼭 404 오류를 생각나게 하는 이름입니다.
 
물론 이내길이라는 영화가 그것까지 노리고 만들어지진 않았을 테지만요.
 
고해림:oO(기분나빠..................)
 
정세현은 정말 그 영화를 좋아하는 게 맞는 것인지 자연스럽게 열쇠를 받아 404호로 향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불쑥 다정한 향이 코를 파고듭니다.
 
다정한 향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내음은 서글프게 두 사람을 감싸안습니다.
 
전체적으로 앤틱하게 꾸며진 호텔의 안은 아주 오랜 시간 두 사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굴고 있습니다.
 
창으로는 열기 없는 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여름의 눅눅함은 안에 시원하게 켜진 에어컨으로 모두 사라진 상태입니다.
 
고해림:
관찰력
기준치: 70/35/14
굴림: 64
판정결과: 보통 성공
 
침대와 서랍, 벽장, 욕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작동하지 않지만 두 번째 서랍만 열립니다. 영화에서 실제로 드러난 부분만 구현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고해림:(두 번째 서랍 열어본다...) 별걸 다 구현해놨네. (...)
 
고해림:
기준치: 58/29/11
굴림: 12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서랍을 열어보면... 쪽지 한 장이 놓여있습니다.
 
『 사랑하기만 하면 그만인 거야? 더 욕심내는 게 좋지 않겠어? 』
 
휘갈겨 쓴 글씨체입니다.
 
고해림:(대체 무슨 내용의 영화길래 이 모양이지. 한참 들여다 보다 원래 자리에 놓고 도로 닫는다.)
 
정세현은 자연스레 침대에 걸터앉은 채 옆을 두드립니다.
 
정세현:(빠아아아안...)
 
고해림:(.......옆에 가서 앉는다.) 왜 그렇게 봐.
 
정세현:(자연스레 네 어깨에 머리 기댄다.) 이러면 네가 올 거 아니까. (흐흐.)
 
고해림:너 정말 최악이야... 알아? (검지로 이마 툭툭 건드렸다.)
 
정세현:알아. 그게 내 몫이잖아. (고개 더 파고든다.)
... 주인공 두 사람은, 여기서 사랑 이야기를 해. 두 사람의 사랑이 뭔지, 밤은 무엇이고, 서로가 누구인지. (...) 난 그런 거 묻지 않을게. 그냥, 이대로 느끼게 해줘.
아까부터 잠깐씩 숨이 막히더니, 뭔가 자꾸 빠져나가는 기분이라. (입술 달싹인다.) 정세현은, 고해림을 사랑해. 이건 변하지 않겠지.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는 누군가를 향해 속삭이는 자장가이며 연서입니다.
 
빠져나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곘으나 사랑한다는 끊임없는 고백은 어쩌면 당신을 향한 열렬한 확신이며 자신을 향해 주는 다짐 같기도 합니다.
 
고해림:(고해림치고 제법 불량하게 건드리던 손은 흘러내린 머리칼을 대강 넘겨주고 떨어진다.) 바보. 변하지 않는 건 없어.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될 것 같아.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직감한 것이든 희망사항이든... 고해림은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살아서가 되든 죽어서가 되든 언젠가,
우리는 서로를 그만 증오하게 될 거야.
그때는 네 사랑도 내 사랑도 끝나겠지.
나는 그날만을 기다려...
 
정세현:(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있을 문장들. 굳이 입에 담지 않는다. 순전히 저를 위한 선택이다.) 잔인하네... 너. (사랑도, 증오도 그 무엇도 없는 우리를 바라는 거야? 이 역시 묻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중얼거리는 말은 이윽고 사랑해라는 세 글자로 귀결됩니다.
 
그것이 당신의 이름이고 나의 이름이라는 것처럼.
 
이 밤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내 사랑은 끊이질 않을 거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두려움, 슬픔, 우울함 같은 것에 젖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때요. 이런 정세현은 고해림이 사랑하는 정세현일까요.
 
정세현: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잖아. 그래야만 해. 드디어... 내가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랑을 다 한 것처럼 너를 사랑하고, 너를 위해 그 외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그래. 이런 기이한 애정에 목숨을 거는 게 사랑이 아닐까?
 
정세현은 불안정합니다. 그것만은 명백한 진실이죠.
 
하지만 그것만이 진실은 아닙니다.
 
정세현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당신을 원하고 있고,
 
원하던 대로 망가졌으며,
 
이것은 사랑에서 한 겹 나아간 집착입니다.
 
사랑에 대한 집착, 당신에 대한 집착.
 
이것을 우리는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요.
 
고해림:(위태로운 너를 봤다. 고해림은 한 치도 배려할 수 없었고, 상냥하게, 다정하게 굴 수 없었다. 네가 이토록 이기적인데, 홀로 헌신하기가 두려웠다.) 세현아.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나만이 너를 온전히 사랑해. 너는 내 전부를 사랑할 수 없어...
 
정세현:(피차 상대 갉아먹으며 살아오던 사람들이다. 이기적이고, 추잡하고, 그득그득 찬 제 욕망 숨기며 남의 것만 끌어내리던... 그래서 어떤 말도 수용할 수 없었다. 수용하지 않는 게 맞았다. 사랑이 맞는지 아닌지는, 감히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야, 고해림. 넌 그냥, ...) 어느 쪽이든 받아들여. 내 어떤 감정이라도.
(짧은 숨. 주제 돌리듯 옅은 미소 보인 채.) 여길 넘어가면 엔딩을 보게 될 거야. 난 이곳에서의 기억으로 평생을 갉아먹고 살 테니까, 넌...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말에 순응하고, 인정하고 사랑해. 여기서 더 무너지면, 약속 어기고 널 외롭게 만들어버릴 것 같으니까.
 
고해림:(굳게 박아넣었던 부정이 어지러이 흐트러진다. 네 말 한 마디에 삶과 죽음을 오가는 비정형을 느꼈다. 네 미소에 심장소리는 커졌고, 눈꺼풀이 내려감기다가 이내 눈 감는다. 최선의 회피였고, 고해림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직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아서.) ...안 그럴게. 앞으로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게. 그런 협박은 하지 말아줘...
너는 나를 사랑해.
나도 그래.
우리는 증오하는 만큼 애정해.
세현아. 그건 항상 진실일 거야. (마침내 인정한다. 너를 만난 이래로 가장 무겁고 버거운 진실을 뱉었다. 고해림은 시인한다.)
 
그 진실을 시인하자마자, 정세현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밤이 끝나갑니다.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보통 이러고 보랏빛으로 하늘이 밝아왔었죠.
 
하지만 지금의 하늘은 오렌지색입니다.
 
그것이 퍽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곳이 가상현실, 그것도 영화 속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순간이네요.
 
정세현:3
 
웃는 낯의 정세현이 무언가 중얼거립니다. 순간 표정이 일그러집니다.
 
고해림: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95
판정결과: 실패
 
정세현:... 아무것도, ... ... 아파...
 
그는 왠지 모르게 목을 매만지고 있습니다.
 
정세현 본인도 짐작이 가는 게 없다는 듯 목믈 매만질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보입니다.
 
정세현의 목의 글자가요.
 
그것은 더욱 선명해졌으나 끝부분부터 사라지고 있습니다.
 
'감정파'
 
일 자가 사라져 있습니다.
 
정세현:영화의 마지막 씬, 끝까지 함께해야지. 가자.
 
그는 태연하게 말을 잇습니다.
 
정말로 괜찮은 게 맞을까요?
 
몸을 일으키고, 나갈 준비를 하는 그가 왠지 모르게 멀게 느껴집니다.
 
순간마다 달라지고 있어요.
 
아, 또… 지독한 외로움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는 익숙하게끔 느껴지는 글자가 떠오릅니다.
 
아까처럼, 정세현의 목을 휘감고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착각인지 진실인지, 정세현의 모습이 도트처럼 미친 듯이 깨져 보입니다.
 
일그러지고, 노이즈가 일어나고, 조금씩 부서지며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아주 오래된 게임이 서서히 버그가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처럼…….
 
고해림: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94
판정결과: 실패
 
……정신 차리세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당신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챕니다.
 
끌려감과 동시에 정세현이 완전히 깨져버립니다.
 
그래픽이 무너지는 것처럼.
 
눈을 뜨면 연구원처럼 보이는 이들이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고해림의 손목에 붙어있는 기계 장치를 제거하고는 리모컨을 조종합니다.
 
자동적으로 당신이 누워있던 침대의 등받이가 서서히 일어납니다.
 
직원:괜찮으세요? 저는 WUSL 직원입니다. 체험을 진행하던 도중 갑작스러운 오류를 발견해서 체험을 중단하였어요.
예상치 못했던 버그라, 저희도 미리 대비하지 못했어요. 금액은 환불해 드리겠습니다. 두 분에게 이상은 느껴지지 않으니 그 부분은 너무 걱정 마세요.
 
고해림:저는 괜찮습니다. ...오류라니 무슨. (불유쾌하게 이마 짚었다. 세현 바라본다.)
 
연구원은 따라 옆을 돌아봅니다. 그곳에서는 정세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고해림:
관찰력
기준치: 70/35/14
굴림: 77
판정결과: 실패
 
'감정' 정세현의 목에 선명하게 적혀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는 불편한 듯 그곳을 긁고 있습니다. 그것 외로는 불편한 게 없어 보이네요.
 
두 사람은 간단한 절차 이후에 호텔을 벗어났습니다.
 
하늘에 노을이 잔뜩 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영화의 끝과 다를 게 하나도 없네요.
 
정세현은 잠시 호텔의 앞에 서서 노을을 바라봅니다.
 
아쉽다거나, 다음에 또 오자거나의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은 같은 모습일까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해림이 보는 하늘에는 이제는 슬슬 익숙해질 수준의 글자가 떠오르고 있으니까요.
 
정세현:해림아. ... 내가 널 더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넌 어떻게 할 거야? 만족해? 기뻐?
 
정세현의 질문은 갑작스럽습니다.
 
그런 질문을 이 타이밍에, 갑자기 왜 하는 걸까요?
 
무표정한 얼굴은 노을을 등지고 있습니다.
 
역광 때문일까요. 얼굴이 지독하게 어둡습니다.
 
아까만 해도… 어둠 속에서도 그 형형한 눈만은 존재했는데,
 
이번에는 모든 것이 보임에도 눈동자만은 어두운 것 같습니다.
 
하루에 수백, 수천은 보아왔던, 지겨운 타인을 보는 듯한 눈입니다.
 
고해림:
SAN Roll
기준치: 38/19/7
굴림: 67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순간, 조금은 머릿속을 들여본 듯합니다.
 
이제껏 느껴온 사랑이 방금 전과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요.
 
그리고 아주 간단한 상식이 있지 않나요?
 
그 비이성적인 머리로도 말입니다.
 
사랑은 의문을 느끼는 순간, 변질되기 시작한다고요.
 
고해림:내가 어떻게 뭔가를 할 수 있겠어. (손으로 심장 부근 꾹 누른다, 만약을 가정한 말 한 마디가 이렇게 차다.) 그, 그래도 계속 같이 있어줄 거지. ...응? (답잖게 약간은 조급하다.) 증오해도.
 
분명한 불안을 눈치챘음에도, 대꾸할 생각 없는 양 느리게 몸을 돌린 정세현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다시 그래픽처럼 깨져버릴 것 같습니다.
 
전부 부서지고 나면 이번에는 깨어날 꿈도 없는데요.
 
여름의 해는 길죠.
 
하지만 밤으로 향하는 노을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춥니다.
 
동쪽 끝에서부터 보랏빛 어둠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막처럼 느리게 펼쳐지지만 물감처럼 빠르게 색을 덧대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도 하늘은 아름답고……,
 
...
 
자전거 하나가 정세현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고해림:
민첩
기준치: 60/30/12
굴림: 79
판정결과: 실패
 
자전거가 정세현의 곁을 훅 스쳐갑니다.
 
차마 뒤를 보지 못했던 정세현은 뒤늦게 피하다 그 자리에서 넘어집니다.
 
자전거의 주인은 사과를 하는 둥 마는 둥 빠르게 두 사람을 스쳐서 달려가버립니다.
 
누군가를 다급하게 부르는 것 같아요.
 
사람을 다치게 하고 저렇게 아무 말도 없이 지나가다뇨! 정말 예의가 없는 사람이네요.
 
정세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며 상처가 난 곳을 살핍니다. 어정쩡하게 달려오다 멈춘 고해림도 흘끗, 보고요.
 
정세현: 얼씨구...
 
고해림:....... (기분이많이안좋아짐............) ...괜찮아? 미안. (못잡아줘서.......)
 
정세현:괜찮아. 너 달려왔어도 같이 넘어졌겠지. 문제는... (여기가 아니라 저쪽이니까. 하며 시선 원인제공자에게로 돌린다.)
 
시선으로 그 자전거를 따라가보면 그는 급기야 자전거를 버리고 누군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상대쪽에서 오던 사람도 보란 듯이 상대에게 달려가고……,
 
무슨 로맨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둥켜 안고 있네요.
 
대충 눈치를 보니 두 사람이 재결합을 한 모양이에요.
 
연인 사이에 이런 일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니까요.
 
얼마나 급했으면 저렇게 달려갔나 싶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는 아니죠.
 
한심하다는 듯 눈 한 번 흘린 정세현은, 붉어진 제 손바닥 펼쳐 보이며 장난으로 무마합니다.
 
정세현:호~ 해줘. 미안하면.
 
고해림:(흐린눈...) 생각해 보니 별로 안 미안한 것 같아. 이따 치료해줄게.
 
정세현:다음엔 오토바이 앞에 서 있을까...
 
고해림:(하..............) 네 손 씹어버리기 전에 마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어. 진짜로. 완전히. 정말.
 
정세현:... 진짜?
 
고해림:...짜증나. (호...~)
 
정세현:(결국 해줄 거면서. 큭큭 웃는 낯 여상하다.) 넌 이렇게 그대로인데. ...
왠지 이 노을이 지면 모르는 길이 나올 것 같아.
 
정세현은 아까부터 답지 않게 꽤 감상적인 느낌입니다.
 
그리고 미묘하게 고해림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적당한 거리를 두기 시작하네요.
 
앞으로 걸어가던 정세현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툭, 떨어집니다.
 
그는 눈치도 못챈 양 그저 걸어가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보여주었던 수첩인 것 같네요.
 
꽤 애지중지하게 여겼던 것 같은데 저렇게 잊어버린 것처럼 지나가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아니면 살짝,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고해림:(세현 뒷모습 허전한 듯 한 번 보더니 수첩 주워 내용 본다...)
 
첫 번째 페이지. 책의 일부를 찢어내거나 복사한 것 같은 종이를 잘 접어두었습니다.
 
▶:『 행복 총량의 법칙 : 한 공간에서 가질 수 있는 행복은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 존재하는 생명이 많을수록 하나의 존재가 가져갈 수 있는 행복은 줄어들게 된다. 누군가가 오롯이 행복하게 되면 누군가는 오롯이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
『 이 세계는 여러 개의 법칙으로 지배되고 있다. 총량의 법칙 그리고 ■■의 법칙 등이 대표적이겠다. 둘은 공생 관계로 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고 필요할 경우 불순물을 제거하기도 한다. 인류가 아닌 존재하는 이 우주를 위해 생성된 법칙은 기본적으로 이들에게 관대하고 여럿의 기회를 주나……. 』
 
이 뒤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다음 페이지로 넘길까요?
 
고해림:(읽을 수 있는 곳까지 다 읽고 넘긴다.)
 
이내길 영화 티켓이 꽂혀 있던 자리입니다. 정세현의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남겨져 있습니다.
 
아마 대사 일부를 받아적인 것 같습니다.
 
▶:ㅡ 사랑의 신은 역사적으로 늘 있어왔어. 억지로 사랑하게 하는 것도 가능했지. 그치만 결국 그런 사랑은……, 벌을 받지 않았던가? 그렇게라도 사랑하고 싶은 건가?
ㅡ 하지만 억지로 만든 사랑이라도 진심이라면 그걸 비난할 사람이 있나? 지금은 낭만의 시대 아니에요?
ㅡ 만들어진 낭만은 연극에 불과하니까.
ㅡ 꽤 단호하네요. 저는 그런 연극도 좋아해요. 방금 우리가 한 입맞춤처럼요. 우리는 지금 입을 맞추기로 합의한 뒤에 입을 맞춘 거잖아요? 이것도 연극 아니에요? 그치만 낭만적이었어.
ㅡ 그럴지도.
 
고해림:
관찰력
기준치: 70/35/14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대사는 거기까지만 적혀있는 듯합니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까요?
 
고해림:(유심히 보다 넘긴다...)
 
일기 중 일부 같습니다.
 
▶:A는 홍수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감당할 수 없으면 흘려보내면 되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감정을 버리고 싶은 마음과 감당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고 했다. 나는 그걸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 뒤로 두꺼운 사진이 붙어있는 페이지가 있습니다.
 
고해림:(다음 페이지 넘긴다. 다 끊겨 있네...)
 
노을 사진을 잘라서 붙여둔 것 같습니다.
 
이별하고 싶으면 노을을 보러 가야지.
 
라는 글자가 작게 적혀 있습니다.
 
고해림:
관찰력
기준치: 70/35/14
굴림: 50
판정결과: 보통 성공
 
『 노을이 끝나면 이내길을 볼 수 있어. 』
 
수첩의 마지막 장에는 글자가 기어다니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집어넣은 것 같은 글자입니다.
 
고해림:
지능
기준치: 65/32/13
굴림: 5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은 아마 세상의 감정에는 총량이 있다는 논리 같습니다.
 
또한 인위적인 사랑은 아름답지 않으며……, 감정에 대한 고민도 보이네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사랑도 총량이 있다면요?
 
그리고 그 전체를 한 사람에게 몰아넣으면……,
 
방금까지의 정세현처럼 망가져버리지 않을까요?
 
믿고 싶지는 않지만요.
 
고해림:
SAN Roll
기준치: 37/18/7
굴림: 31
판정결과: 보통 성공
(...문득 앞서가는 세현 본다. 한숨과 같이 잔웃음이 나왔다. 결국 부서지는 건 우리야. 항상.)
 
▶:이성 감소 없음
 
고해림이 수첩을 다 읽고 나서야 마법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멈추어 섭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수첩이 없어졌다는 걸 알았는지 열심히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습니다.
 
얼마 안 가 당신의 손에 들린 걸 확인했는지 천천히 다가옵니다.
 
정세현:떨어뜨렸었네. 돌려주라.
 
고해림:(아무 말 없이 건넨다.) 왜 나랑 같이 노을을 봤어. 영화 속 장면 보여주고 싶어서, 그게 다야?
 
정세현:... 봤구나. (네겐 더 숨길 것도 없겠다. 그리 되내었다. 네가 알고 있는 나는, 언제나 밑바닥이어야 하니까.) 그거 알아? 이내길은, ... 사실 '이별길'이라는 말의 별 자가 녹슬어 지워진 거야. 이내길이 아니라, 이별길을 걷고 있었으면서. 그게 다라곤 못하지.
네가 그랬지. 난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응시한다.) ... 알고 있는 게 있어? 난 갑자기 널 미친듯이 사랑했다가, 또 지금은 전부 역겨워져서...
 
고해림:(한순간에 끌어내려진다. 이보다 더 깊은 곳이 있을까 싶다가도 이런 너를 받아들이면, 매번 훨씬 낮은 곳으로 가게 됐다.) 한순간의 변덕이었나 보지. 그럼. (행복에도 총량이 있다면 애정에도 총량이 있으리라 자연히 생각한다. 너와 나 사이에 잔존하는 단어들을 그런 기계적인 절차로 치부하고 싶지 않아 유연히 넘겼다.) 난 네가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도 믿지 않을 듯 얄팍한 어조.) 그런데 가버리지는 마. 앞서가는 것까지도 괜찮아. 날 내버려 두지는 말아달라고...
 
정세현:(한순간의 변덕. 제게 사랑의 무게는 그리 가볍지 않았을 터인데, 별다른 이유를 찾지 못해 반박 없이 그대로 담는다. 이상하지. 사랑을 갈구하는 건 너고, 원치 않는 것 역시 너다. 느끼지 않아도 될 감정을 억지로 떠맡은 기분이다. 웃음기 사라진다.) 너, 애초에 내 사랑 같은 건 원하지도 않았구나. 난 이 역겨움 속에서도... 계속해서 널 사랑하고 있는데, 이제야 사랑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괜찮아? 이런 사랑을 주지 않아도.
내가 널 완전히 사랑하지 않으면... ... (지금처럼 널 미워할 애정도, 시간을 쓸 필요도 없어지는 거잖아... 당최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어. 아아... 이딴 게 사랑이라면, 차라리 죽여버리는 편이 낫겠다. 그 생각까지 가자, 네게서 시선 떼어낸다.)
 
고해림:(원하지 않는다. 너는 있어도 아프고, 없어도 아픈 존재라. 네 사랑도 마찬가지다. 네 증오도. 결국은 너와 네 애정과 네 혐오 모두를 갈망하고 있으면서도 괴롭다고 밀어내는 꼴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사고회로 온전치 못하다.) 너는 나를 미워해. 싫어하고 염오하고. 그냥... 그냥 그거면 돼. 네가 나를 떠나지 않을 정도로 진득한 감정 그거 하나면 충분해. (그 증오 또한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고해림은 받아들일 것이다. 낭만이 아니라 증오에서 기인한 사랑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것이다. 작금의 네 첨예하고 잔인한 시선을 알았다. 감내한다.)
싫어한다고 말해줘... 정말로, 죽도록 혐오해서, 널 떠나지 않고 영영 낙인으로 남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줘.
 
정세현:(저를 누구보다 낮은 곳에서 갈망하고 사랑하면서도, 똑같은 사랑이 아닌 혐오를 바라는 건 이 세상에 고해림이란 인간 단 하나밖에 없으리라. 이해가 안 되는 건 하루이틀이 아니었음에도 그 뒤틀린 채 맹목적인 사랑이 달가워 제멋대로 휘둘렀던 벌을 드디어 받게 되는 건가 싶었다. 솔직하지 않은 건 누군지, 속내 까내지 않는 것이 옳은지, 하나하나 재단하다간 타인이 말하는 정상 앞에서 깨질 것이 분명한 비이성적 애착.) 나는.... (널... ... 입술 꾹 물었다. 알잖아. 정세현은 이기적이다. 제가 겪은 고통은 반드시 돌려줘야만 했고, 네가 원하는 바를 언제나 이루어주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번엔 이유가 조금 달랐다. 대답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이 관계를, 세상이 정립한 편협한 단어들로 쉽게 정의하고 싶지 않았다.)
너도 못지 않게 최악이야. 알지.
 
하늘의 절반은 오렌지, 절반은 보라 그리고 검정입니다.
 
어스레한 하늘에 흰색 달이 차오릅니다.
 
두 개의 세상이 섞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애틋하고, 또한 이상합니다.
 
기묘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맑은 바다를 담은 푸른빛도, 기이한 보라빛도 아닌 애매한 색의 눈동자.
 
지독한 고통을 새기기라도 한 것처럼 닮아있던 두 사람의 눈엔 달이 비칠까요.
 
혹은 노을이 비칠까요, 밤이 비칠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서로가 비칠까요.
 
눈에 비친 당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요.
 
그것이……, 이제 두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까요?
 
정세현:왠지 이 길을 다 가면... 정말로, 끝날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정세현의 목소리는 꽤 담담합니다.
 
이제는 노을보다 밤하늘이 더욱 진하게 지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고해림, 정세현의 눈 안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나요?
 
그 눈에는 대체 무엇을 가리고 있고, 무엇을 드러내고 있나요?
 
아, 그리고 당신은 전광판처럼 정세현의 눈에 지나가는 글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건 대체 무슨 글자이며 무엇을 전하고 싶은 걸까요?
 
일순 세상이 멈춘 것 같습니다. 등골로 소름이 끼칩니다.
 
고해림:
SAN Roll
기준치: 37/18/7
굴림: 1
판정결과: 대성공
 
▶:이성 감소 없음
 
LOVE라는 글자가 사라졌습니다.
 
아까까지 차오르고 있던 게이지도 사라졌습니다.
 
세상이 멈춘 것 같다는 생각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건지, 갑작스럽게 누군가가 고해림의 뒤에 서있습니다.
 
아니, 서있는 건가요?
 
이것은 그림자인가요? 공기인가요?
 
목소리가 속삭입니다.
 
돌아보지 마. 돌아보면 너희 둘 다, 여기서 더 미치게 만들어버릴 거야.
 
나는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완전히 뒤집을 순 없어. 그래서 알려주는 정보야.
 
정세현의 사랑은 세계의 오류로 판명되어 강제로 수정 당하고 있어.
 
세계의 사랑을 멋대로 한 명이 가져갔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하지만 내가 너에게 기회를 주지. 힘을 주는 거야.
 
정세현의 사랑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는 힘을. 법칙의 전제를 뒤집지 않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것'은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사랑하다 끝난 상대는 남보다 못하게 되기 마련이야.
 
그리고 정세현은 지금 널 ■■하고.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이대로 정세현이 수정 당하면 너희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될 거야.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이제껏 서로에게 남긴 그 무엇 하나 의미 부여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이지.
 
내 말 알겠지? 같은 쪽으로 가. 영원히 같이 걸어 가라고.
 
...
 
계약했잖아.
 
라는 말을 끝으로 웃던 상대의 존재가 옅어지더니……, 곧 사라져버립니다.
 
힘이라니?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게다가 계약이라뇨? 대체 무엇을 담보로요?
 
고해림:
SAN Roll
기준치: 37/18/7
굴림: 43
판정결과: 실패
 
▶:이성 -2
 
그와 동시에 다시 세상이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정세현의 눈 상태도 여전하네요.
 
그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고는 말합니다.
 
정세현:도착해버렸어.
 
이내길, 이별길에.
 
끊겠습니다............... (GM):소신발언이렇게까지망할줄몰랐음개큰일남 수고하셨습니다.... 23일에 뵈어요 아마 2시간도 안 돼서 끝날듯
 
정말수고하셧ㅇ허요....................아너무재밋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진짜요 원래이럿게망한시날이아니엇다니
너무재밋네요정말로..............23일에봅시다탐봐요............
 
끊겠습니다............... (GM):굿!
 
준비가 되셨다면 아무 롤이나 함 굴려보시죠
 
고해림:
관계장례식 Roll
기준치: 1/0/0
굴림: 52
판정결과: 실패
 
ㅠㅠ
 
고해림:ㅠㅠ
 
그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고는 말합니다.
 
도착해버렸어.
 
이내길, 이별길에.
 
고해림:
관찰력
기준치: 70/35/14
굴림: 37
판정결과: 보통 성공
 
아직 영화에서 깨어나지 못한 걸까요? 이내길이 진짜로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습니다.
 
그렇게 히트한 영화도 아닌걸요.
 
영화를 찍은 장소 같은 게 남아있을 만큼의 의미도 없습니다.
 
아주 낡은 표지판에 '이내길'... 아니, '이별길'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표지판 아래에는 갈림길이 나 있습니다.
 
사방으로 이름 모를 꽃이 피어 있습니다.
 
둘 다 어느 쪽으로 향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목적지 같은 게 알 게 뭔가요.
 
영화에는 나오지도 않았는데요.
 
알 방법은 없습니다.
 
사랑의 끝이 늘 그랬던 것처럼요.
 
천천히 글자가 새겨지고 있습니다.
 
정세현은 가만히 고해림을 바라봅니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 읽을 수 없습니다.
 
정세현은 어느 쪽의 갈림길 앞에 섭니다.
 
정세현:사랑은 인간을 살게 할까, 죽게 할까?
 
분명히 아까 했던 질문입니다.
 
당신은 이에 대답을 했나요? 하지 않았나요?
 
이미 하늘에 밤이 찾아왔습니다.
 
영원한 밤일지도 몰라요.
 
이 다음엔 아침이 올까요. 아니면 노을이 질까요.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꿈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고…….
 
사실 상관 없었을지도 몰라요.
 
사랑에 빠진다는 건 이런 기분인가요?
 
꼭 그의 세상에 더러운 흔적 새기며 들어가고 싶고,
 
밑바닥까지 보아 거짓된 말들을 뜯어내고 싶고,
 
둘이서 영원토록 빛에서 도망치더라도 함께면 괜찮다는 안일함이 들고.
 
조금도 아름답지 않은 기분이 들다가도,
 
아름답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고.
 
정세현:한 순간 감정이 울컥 쏟아지다가도 결국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이제 끝나간다는 생각이 드니까, 아침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이 모든 게, 쓸모가 있을까?
 
그는 다시 질문합니다.
 
정세현:고해림. 사랑은 너를 살게 할까, 죽게 할까?
이 세계는 어째서 인간을 사랑하게 만드는 걸까?
왜 우리는 기어코 증오하고, 또 사랑하고 마는 걸까.
왜 사랑은 언젠가 끝나야만 하는 거지?
... 이건, 사랑일까?
 
진득하고, 역겹고, 고통스러우며… 미련해질 정도로 놓기 힘든 감정입니다.
 
우리는 이 감정을 무어라 부르기로 했던가요.
 
사랑인가요. 증오인가요.
 
무어라 정의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질까요.
 
꽃 향기가 진동합니다.
 
사랑이 진동합니다.
 
두 사람의 감정이 산발적으로 뒤엉키다가 산화하고, 산화하다가도 다시 쏟아져 숨통을 틀어막습니다.
 
고해림:
지능
기준치: 65/32/13
굴림: 8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 세계에 지배 당하는 인간, 인간을 지배하는 사랑…….
 
그렇다면 결국 이 세계를 지배하는 건 사랑인가요?
 
아, 맞아요. 사랑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사랑이, 고해림을 인도했으며 이제는 떠나보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결국 사랑이란 법칙에 지배 당했던 건가 봐요.
 
고해림:
SAN Roll
기준치: 35/17/7
굴림: 98
판정결과: 대실패
 
▶:이성 -1
 
영원이라는 건 과연 존재할까요.
 
우리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의 정체도 모릅니다.
 
이곳이 꽃밭이고 두 사람은 이별을 도처에 두고도 사랑하며, 증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할 뿐이죠.
 
사랑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 최고의 난제입니다.
 
정세현:대답해 줘. 내 증오와 사랑, 너를 향한 모든 감정은... 고해림을 살게 할까, 죽게 할까.
 
고해림:나를 죽게 해. 그런데 난 본래 제대로 살아가고 있질 않았어서.
나를 죽이는 네 증오와 사랑이 좋아.
죽어가는 삶이 좋아.
너는. 살아가고 있어, 죽어가고 있어?
 
정세현:정말로 죽일 수 있어. 이번엔 진짜야. 끝내 널 죽이고, 똑같이 죽어버릴 수 있어. 로맨틱하지...
그래도 좋아? 내게 묶인 채 죽어버린 보잘 것 없는 삶이거나, 그 삶을 벗어날 마지막 기회가 될 텐데.
... 넌 나를 죽이고 있어. 그래서 더욱 살고 싶게 해.
 
고해림:정세현이 죽어버릴 수 있다니 말도 안 되잖아··· (넌 살아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말은 뱉을 수 없었다. 고해림은 죽고 죽이는 것을 아직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에.)
어서 내게 증오를 고백해줘! 너는 나를 그만 사랑하고, 나는 너를 오래 사랑할 수 있게. 우리는 그게 딱 좋아.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너는 나보다 더 낮은 밑바닥으로 가는 거야. 그럴 수는 없어··· 같은 곳에 같이 있자. 그냥 이렇게.
 
정세현:바보...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너와 같은 곳에 있으려면, 너를 증오하려면,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해. 겨우 너 같은 것에게 향하는 마음이 사랑이라 정의내려 나를 끌어내려야 해.
이건 증오의 고백이야, 사랑의 고백이야?
욕심 많은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흐... (네게 가까이 다가가 다시금 손 뻗어 흉터를 훑는다. 다정한 투.) 관계를 정의하는 게 두려워? 떠나는 게 두렵구나. 나보다, 외로움이 더 무서워? 그 비정상적인 사랑이 널 살게 해?
 
고해림:내가 그렇게 밑바닥이었나. (흐리고 자조적인 미소 후에.) 내가 무서워하는 건 바다 하나밖에 없었는데. 죽음도 살인자가 되는 것도, 친구들이 다 죽어버리는 것도 겁내지 않았는데···.
(살갗에 와닿는 감각이 끔찍하게도 좋았다. 허공으로 산화한다고 생각하면 근원 모를 공허감이 쏟아졌다. 단순히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네가 망쳐놓은 나는 그래. 너 없는 삶이 무서워.
네가 헤집어놓은 내 사랑의 정의가,
나를 살게 해.
그러니까 더 이상 나를 망치지 말아줘··· 무서워하는 게 너무 많아졌어. 무슨 의미인지 알아?
용서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너를 영영 사랑할 테니까. 영원히 죄인으로 남을 테니까···.
 
정세현:(가만히 그 낯 바라본다. 두려워하고 있구나. 말마따나, 내가, 이 사랑이, 감정이, 너를 죽이고 있다. 고해림을 향한 살의는 곧 스스로의 밑바닥을 고하는 꼴이라, 같은 외줄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이 요동친다. 정세현은 어쩌면 처음으로 위기를 느꼈다. 역겨움을 감출 수 없다. 절로 미간 찌푸려져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목구멍 끝부터 으릉거리듯 토악감이 몰려온다.) 그래... 넌 생각보다 훨씬, 최악이야. 늘 내 앞에선 그리도 약하게 굴어서, 그 고해림이 나를 사랑해서... (손 슬 내려 목가로 향한다. 꾸욱- 강하게 짓누르지 않아도 쉽게 파이는 근육을 손끝으로 느낀다.)
... 해림아. 내가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지. (그대로 뒷목 끌어당겨 얼굴 가까이 한다. 속삭이듯 귀에 쑤셔박는다.) ... 감당할 수 있어? 네가 날 영원히 사랑할 수 있어? 겨우 나 하나 사라지는 걸로, 경멸받지 못하는 걸로 이렇게 벌벌 떨면서, 죄값 다 받을 수 있냐는 말이야. 확신이 필요해.
 
고해림:나는 언제나 네 앞에서 최악이지. 전에도 지금도. (너는 내 새로운 공포가 된다, 그게 전제였다. 삶을 뭉개놓은 호흡 불능도 네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진다. 목을 내어준 것부터 그 증명이었다. 침잠해 숨 못 쉴까 겁 났지만 네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수백 번 바다에 빠져도 너를 잃지만 않으면 됐다. 이렇게 질척한 날것의 이기심에 속이 모조리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너와 나 사이의 악의가 기껍고 또 역했다.
창백하게 식은 손 뻗어 네 왼눈을 쓸어본다. 눈꺼풀부터 죽 내려서. 기이한 색채에 기이한 생각이 들었다. 그 다정한 눈동자를, 눈알을. 핥아 이로 처절하게 짓이기고 목구멍 너머로 한껏 삼켜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 고해림은 마침내 이것이 회개 불가능한 죄악임을 알아챘다.) 그래. 세현아. 난 너한테 다 내어줬어. 사랑, 증명, 확신, 삶과 죽음, 내 일말의 정의까지 내다 버렸는데. 뭘 더 갖고 싶어? (느린 어조가 고해림을 이루는 것들을 나열한다. 울 것 같은 낯으로 찌푸리면서 고해림은 얕게 웃었다.) 뭐든 줄게.
 
정세현:(기꺼이 네 손길 받는다. 꼭,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최악이다아! 이런 거. (그대로 온 힘 다해 안았다가 떨어진다. 제 표정은, 그 누구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너를 증오해, 해림아. 이게 네가 바랐던 내 밑바닥이고. 널 너무 사랑해서, 딱 그만큼 증오해서, ... 그래서 널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일 생각이야.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 (흐흐. 그 언젠가 보았던 느른한 웃음.)
자. 나를 떠나! 네가 최고로 두려워하는, 외롭고도 안전한 그 길로 가. 내 증오도, 네 사랑도 전부 잃고 고통스럽게 죽어가.
(이것이 정세현이 말한 대가다. 전부 내어줬고, 그걸로도 모자라 뭐든 주겠다는 사람에게 딱 그 반대를 바랐다. 이기적이게, 멋대로 편해지려고 하면 안 되지... 널 살게 하는 건, 내가 네게 주는 고통이잖아.)
예언 하나 할게. 잘 기억해 둬.
네가 우리의 감정을 전부 잊더라도, 그렇게 잘 살아가는가 싶다가도... 끝없이 외로워질 거야. 두렵고, 불안하고, 어딘가 텅 빈 것처럼 서서히 망가져버릴 거야.
마지막으로, 그 죗값 전부 치루고 나면... 고해림은 다시 이 지옥에 찾아와 악몽의 굴레처럼 날 사랑하게 될 거야. 나는 그걸 속죄라고 불러.
 
정세현:너는 어때. 이 속죄도, 고통도, 악의도, 전부 사랑할 수 있어?
 
고해림:(강한 포옹 고작 그것 하나에도 삶이 바스라지는 것은 제 쪽이다. 회피하려다 또다시 네 시선 끝에 들었다. 고해림은 아주 늦은 후회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더 좋은 방도는 없었던 것 같아서, 후회마저도 관뒀다. 두어 발자국 뒷걸음질쳤다. 한순간에 사라져버릴까 무서워 더 멀어지지도 못했다. 한참은 애매한 그 거리에서. 눈앞이 일그러졌고 눈물이 뚝뚝 흘렀다. 붉어진 눈가 손꿈치로 거칠게 짓무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선은 네게서 떨어지질 못했다. 네가 떠나겠다고 말한 지금에서야 고해림은 너를 제대로 마주본다. 차마 피하지 못했고 시선 더 깊게 박아넣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금에서야.)
최악이야······ 내가 언젠가 생각했던 것보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혀. 무딘 칼날이나 박아놓고서는. 오래 살아있으라고, 그렇게, (문장은 제 형태를 찾지 못했다. 손바닥이 온통 젖고 나서야 초라하게 말했다.)
···사랑해. (네가 나를 증오한다고 말하는 순간 내 영원한 사랑이 시작됐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네 영원한 증오가 끝났다. 고해림은 그렇게 생각했다. 우습고 사소하고 변변찮은 말 한 마디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순응을 담았다. 더 원망하는 말은 없었다.) 정세현, 내가 영원히 고통에 살길 바란다면 그렇게 할게. 나는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하고, 증오할 거야. 어느 날은 보고 싶어서 죽으려고 할 거고, 어느 날은 널 원망하고 죽이지 못해 안달낼 거야. 빌어먹을, 이딴 게 네가 바라는 바라면 그렇게 해.
가버려! (보다 큰 소리로 말했다. 목 긁는 소리 섞여 부드럽지 못하다.) 내가 너 필요하다고, 얼마나 초라하게 말했는데, 그렇게 빌었는데,
너는 저주나 뱉고··· 좋아한다면서.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무미건조하게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따위 속죄나 쥐여주고.
난 널 사랑하는데.
 
고해림:그래서 이런 너도 받아들일게. 내가 너무 증오스러워서 이런 끝을 선물하는 너도. 그런 사랑도 받아들일게. 이게 내 답이야.
 
밤이 쏟아지고, 별이 드리웁니다.
 
두 사람의 눈에 별이 쏟아지고,
 
세상에 사랑이 흘러 넘치기 시작하고,
 
정세현과 고해림의 ■■이 쏟아지고,
 
흘러내리며……,
 
이별길을 이별강으로 만듭니다.
 
선택해야 할 때가 왔어요.
 
세계의 사랑을 훔쳐서 아무도 찾지 못할 저 밑바닥으로 영원히 도망쳐버릴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무엇 하나 느끼지 못했던 지난 사이로 돌아갈까요?
 
선택은 당신이 향하는 길에 달렸습니다.
 
결정하고 나면 되돌릴 수 없을 거예요.
 
곧 해가 뜨니까요.
 
정세현:(네 눈물을 보고 처음 든 감정은, 애석하게도 후련함이나 쾌감 따위의 짓궂은 폭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세현은 고해림을 사랑했기에, 또 증오했기에, 모든 감정 넣어둔 채 그것을 대가로 치부했다. 죗값은, 너만이 치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굳이 입밖에 내진 않았다. 너는 누구보다 고통스러워야 하니까. 어떤 손길도 그 마음 약하게 만들어선 안 되니까.)
...... 알아. 알고 있어, 해림아. 기억하고 있어. 내 뇌에, 이 몸에, 뼈저리게 새기고 있어. (그게 네 사랑에 대한 마지막 답이야. 고해림이 순응한 것처럼, 정세현도 철저히 순응했다. 언제나처럼 정세현의 예언은 들어맞을 테다. 그것이 우리의 비정상적인 사랑에 대한 죗값이다. 답을 듣고, 온전히 순응하고 나니 덤덤하게 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미련 따위 가지지도 않았다. 화한 미소로 응한다. 안녕, 고해림. 다시 만나.)
... 하하! 그래. 마지막 인사로는 사랑해가 좋아, 죽어버려-가 좋아?
 
고해림:잊어버리면 안 돼. 너, 내가, (악랄한 문장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틈을 뒀다.) 지옥까지 쫓아갈 거야. 너를 생각하면서 죽어갈 거야. (제 음울한 낯과 대비되는 네 웃음을 눈동자는 차근히 훑는다. 예전에는 네가 참 빛나 보였는데, 정말로 반짝이고 고결한 사람 같아 보였는데. 이제는 경외 따위의 거리감 있고 서늘한 단어들이 사라지고 다정한 증오만 남았다. 고해림은 그게 좋았다. 그래서 네 지독한 고문에도 조금 더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죽어버려. 그쪽이 좋아. 생애 가장 혐오하는 사람이 생긴 것처럼. 네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끔찍하게. 나만이 네 인생의 지옥 같은 종말점인 것처럼.
이건 이별길 같은 게 아냐... 우리 사이에 이별 같은 말은 너무 가볍고 얄팍해.
 
정세현:(지옥까지 쫓아갈 거야. 그 말이 맴돌았다. ... 봐, 넌 다시... 이 지옥에 찾아올 거라니까. 벌써부터, 꼭...... 한 발자국 멀어진다. 너와는 다른 길에 서서, 마지막 말을 건넨다. 사랑해. 증오해. 이기적인 마음으로, 그 두 감정을 전부 먹어치우려면,)
... 죽어버려, 고해림.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로 향하기로 합니다.
 
웃긴 일입니다.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어쩌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또 증오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감싸고 있던 감정들은 무엇일까요.
 
답이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영원히 세계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세계도 말하고 있잖아요.
 
두 사람은 같은 길로 가면 안 된다고요.
 
정세현은 후련한 얼굴로 한 쪽 길 앞에 섭니다.
 
마지막으로 고해림을 등지기 전 정세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립니다.
 
정세현:해림아. 난 지금껏 끓어올랐던 이 모든 감정을 사랑으로 정의했어.
언젠가 내가 너를 다시 ■■하게 된다면,
... 그때는 나랑 같이 도망치자.
 
저 세상의 끝까지.
 
사랑도, 증오도, 어떤 감정으로도 지배 받지 않는 곳으로 영영 떠나버리자.
 
묵음으로 처리된 고백은 아마 고해림에게 닿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때로 누군가의 고백은 영원을 의미하나 대다수의 고백은 마지막을 상정하고 고해하고 마니까요.
 
그는 더 돌아보지 않습니다.
 
당신을 등지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바람이 불고, 별이 쏟아집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유성우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목숨이 저물고, 사랑이 저물고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살게 하나요, 죽게 하나요?
 
저 유성우는 죽음을 의미하나요.
 
정세현이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저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정세현도 알지 못할 겁니다.
 
이별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별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정세현과 함께 길이 사라집니다.
 
이별은 두 사람의 인생에서 한 사람의 마음을 덜어내는 것인가요.
 
만남이 없는 이별이 존재한다면 꼭 이런 형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세현이 걸어간 길이 서서히 어두워지고는 곧 빛의 조각이 되어 쏟아집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잎의 위로 반딧불이마냥 빛들이 쏟아집니다.
 
빛이 속삭입니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살아간다.
 
살아가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
 
당신도 이제 길을 떠나볼까요.
 
이 영원한 꽃잎점은 사랑이 숨을 쉬는 한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어디 사랑이 꽃잎으로, 인위적인 운명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던가요.
 
길을 걸어가면 당연한 것처럼 정세현이 갔던 길이었던 빛무리가 당신을 따라옵니다.
 
홀로 걷는 길은 언제나처럼 고요합니다.
 
그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누군가의 따스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늦여름의 공기가 코를 파고듭니다.
 
무덥고, 정신이 아슬하며, 눈물을 쏟으면 거짓말처럼 산화할 것 같은 무정하나 무고한 향이 당신의 손을 쥡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며 사랑하는 이 세계의 종속자,
 
무결한 사랑 같은 게 어디 있겠어요.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발 뒤로 길이 무너집니다.
 
이별은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별의 끝에도 노을이 지고,
 
밤이 흐르고...
 
아침이 찾아오고... ...
 
고해림이 길의 끝에 닿았을 때, 기어이 아침이 찾아옵니다.
 
그 끝에는 무심한 글자가 당신을 반깁니다.
 
당신의 비정상적인 사랑을 경애합니다.
 
누군가의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까마득하게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
 
천천히 시간이 흐르고,
 
꽃밭을 본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분한 으르렁거림이 들리기도 하다가 곧 눈을 뜨면…,
 
고해림은 온전히 혼자 남습니다.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하루 동안 세상처럼 당신에게 열렬하던 이는 꿈처럼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조금만 더 잘까요.
 
오늘도 열렬히 사랑하기 위하여.
 
▶:KPC 생환 탐사자 생환
정세현은 다시 고해림을 사랑하지 않게 되며 세상의 사랑은 균형을 찾아갑니다. 니알라 토텝은 흥미를 잃어 계약을 깨고 사라집니다.
엔딩 보상 이성 1d5 회복 + 시들지 않는 아스포델 한 송이
 
고해림:5
아이~제기랄
이성필요없다고
정세현돌려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