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적 없는 표지의 책 입니다. 워낙 책이 많기 때문에 확인하지 못했던 책이었을 수도 있겠군요. 루프를 번복하면서 테트라의 침실을 전부 꼼꼼히 살피진 않았기 때문에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일전에 구매해 놨던 책이었을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칭하기에 책은 지나치게 낡아있습니다.
책은 알아보기 힘든 문장으로 가득합니다. 어느 나라의 언어도 아닌 것 같은 문자 나열의 연속입니다. 테트라가 이런 책을 좋아했던가요?
글자는 마치 종이를 먹빛 여백으로 가득 채울 듯 서로 엉켜 붙어 백색을 집어 삼킵니다
종국내 검은색으로 가득해진 종이는 무엇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마지막 장에 흰 글씨로 휘갈겨진 한자가 보입니다. 완연한 문장은 아닌 듯 합니다.
의료에 지식이 전무한 자라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불러오려고 나가는 순간, 걸리는 시간은 현재로서 그 무엇보다도 깁니다.
벨트란 테트라:너보단 덜 미쳤겠지. 다행이라고 생각해. (입이 얕게 움직인다. 한탄 젖은 숨이 느려진다.) 내 말 들었잖아, 보내달라고. 아팠다고. 악인이라 그런가, 끝까지 날 괴롭히려는 셈이야? 그럼 이해가 가네.
락테아:아니, 아니...(혼란스러워져 잠시 자리에 이마 짚고 서서 생각 정리한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금세 표정 험악하게 바꾸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겉옷 벗어 네 손목에 눌렀다. 험악이라기보다는 간절에 가까울 얼굴이다.) 그래, 네 말대로 쓰레기라서 그런가보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입이라도 닥치고 있어! ...다, 내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벨트란 테트라:...거짓말. 넌 항상 그랬어. 어릴 때도, 그래, 커서는 조금 덜 했던가. 그 무엇보다 끔찍한 너라서 더 고통스러워, 티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게 가장 지독해. 사명이고 신념이고 다 잃은 것과 다름없다고. 너는 이해 못 하겠지. 절대로, 죽어서도. 원망스러워. (마지막 눈물 자국이 목소리로 짓눌리고 하나같이 차가운 체온은 겨울에 스미기 시작했다. 가라앉았던 눈 색채가 다시 밝아져도 고통은 여전하단 듯 눌린 손은 떨리고 있다.) 날 위한다면 강제하지 마, 락테아.
잘 지혈되고 있음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애초에 손목 하나로 이렇게까지...
락테아:그래, 난 몰라. 이해 안 돼. 그깟 사명이 뭐고 신념이 뭐라고 이러는지 몰라. 난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해도 약해 빠져 죽어버릴 수천 수만의 사람보다 네가 중요하거든. 네가 중요히 여기는 것과 내가 요하는 것은 절대 일치하지 않아. (...) 그러니까, 나도 네가 미워. 원망스러워. 이게 벌써 몇 번째인데...(들으라는 듯이 심한 욕설 뇌까렸다. 뭘 잘했다고 울어. 모진 말과 다르게 눈가가 벌개졌다. 말과 함께 짓누른 손에 세게 힘준다.) 싫어, 널 위하니까, 나는 네가 살았으면 좋겠으니까 이러는거야. 알아들어?
코 끝을 지독히 저리게 만드는 비린내, 염증내, 눈물과 애증으로 잠겨든 성대가 발음하는 모든 언어가 당신의 심장을 두드립니다.
락테아:마...방...? (이런 단어도 있나? 아직 깨어있으면 책에 대해서 물어볼 수 있을까?)
잠들어 있습니다. 늘 그렇듯 편히 잠들진 못한 모양이지만.
락테아:왜 그새 또 자...(짜증스레 책 덮는다. 책꽂이에 더 확인할 것 없으면 약물 진열장 살핀다...)
✎:직접적인 병 치료가 불가능한 테트라의 통증 경감과 연명을 위한 약물이 [진열장]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빈 신경안정제 53박스, 여분 안정제, 마약성 진통제, 해열제, 소염제, 스테로이드. 없는 것이 없었죠. 진열장 아래에는 링겔에 바로 주사하거나 근육에 주사할 수 있는 주사기들이 채워져 있습니다.
이전 루프에서 테트라는 아마, 여기에 있는 주사기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겁니다.
락테아:(주사기...안 보이게 잘 한쪽 구석에 쑤셔넣는다....)(진열장에 더 확인할 게 있나?)
✎:진열장 내부에는 약물과 주사기가 가득합니다. 이전 루프에서 보았던 것들과 같습니다. 따로 더 살펴볼 건 없을 것 같군요.
이제 주사기는 치워버렸네요.
락테아:(인상 팍...)(졸고 있는 벨트란 구경하러간다...)
락테아, 당신이 자신의 생을 바쳐가며 지속적으로 과거에 고착된 모든 이유입니다.
따뜻한 미음을 머금고 허기가 가셨는지 까무룩 졸고 있습니다.
참... ... 앙상합니다. 가는 팔뚝에 꽂아진 링겔은 매일 같이 진통제가 투여되고 있겠죠.
이불로 [다리]를 덮어둔 채 입니다.
락테아:(깨지 않게 슬쩍 이불 들춰본다. 이번에도 뭔가 달라진 게 있나?)
졸고 있는 테트라가 깨지 않게끔, 고요한 손길로 이불을 걷습니다.
흰 이불 속에 포박된 다리가 허공에 노출되자, 염증 들끓는 시큼한 악취가 다시금 코를 찌릅니다.
✎:...검은 얼룩은 발목 가로질러 종아리를 썩히고 있습니다.
발등, 발목, 이제는 종아리인 걸까요. 무언가 잘못됐어요.
건조한 살 표피 틈새로 검게 썩어든 그것은, 종아리의 살덩이를 완전히 덮어 더이상 살점의 효험을 잃은 것 처럼 보입니다.
...
벨트란 테트라:보기에 끔찍하게 흉한데 구태여…
이불을 걷는 기색에 눈을 뜬 테트라가 고통을 억누른 쉰 성대가 볼품 없는 문장을 발음합니다.
녹빛 홍채에 희망이라곤 한 점 없어 보입니다.
락테아:...깨, 깼어? (급하게 들춘 손 내리고는 어색한 몸짓으로) ...더 자.
벨트란 테트라:무슨 일로 신경질을 안 내. 이상하네. (작은 소리로 말 늘어놓는다.) 누구 덕분에 다 깼어. 유감스럽다. 너무 오래 잔 탓인가.
락테아:내가 만날 신경질 내는 사람인 줄 알아? ...원래 자면 잘수록 졸린 법인데. (빤히 바라보다가 침대 끝에 살짝 걸터 앉아 네 어깨 꾹 누른다.) 깨어있어도 도움 안 되니까 잠이나 자, 멍청아.
벨트란 테트라:싫어, 락테아. 나 지금 너무 아프거든. 아침에 진통제를 못 맞아서... ... 혹시 링겔에 달려 있는 버튼 눌러줄 수 있을까. (일어나기가 너무 괴로워. 중얼거리듯 한숨처럼 기어나온 말이다.)
락테아:...아침에, 못 맞았다고? (기억 더듬어본다. 분명 간병인이 아침에 놓지 않았나? 리셋된건가? 한숨 쉬며 시키는대로 얌전히 버튼 누른다.) ...아프면, 잘됐네. 그냥 그대로 침잠하면 되겠네.
마른 손아귀가 링거액에 매달린 작은 기계 장치를 가르켰습니다.
일전에도 본 적이 있었죠. 간병인이 자리를 비울 때 달아 놓았던 보조 기구입니다.
통증이 느껴질 때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진통제가 링거액에 섞이게 되는 장치였어요.
✎:평소엔 테트라가 자의적으로 필요할 때 눌렀지만, 지금은... ... 다리가 썩어 들어가 일어나기도 힘들 정도로 괴로운가 봅니다.
벨트란 테트라:네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내가 싫지만. 여기에서 더 침잠할 곳 있다면 생의 끝 이상으로 더 있나... 반가운 말이긴 하네. (자조적으로 웃는다. 엷고 투명한 표정이 너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더 아픈 것 같네. 왜 그런 걸까.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하고 작게 속살이는 문장을 끝으로 살풋 눈을 감았다 뜹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네요.
락테아:그래? 최악의 악당이 잘난 히어로 하나 아프다고 안절부절 못하고 이러고 있는데, 기분이 어때? 뭐라도 된 기분이려나? (네 말에 헛웃음 지으며 가만히 네게 기대었다. 아직 미약한 사람의 온기가 살아있음을 말해주는 듯해 안심이 되면서도 두려워졌다.) ...죽지는, 마.
벨트란 테트라:왜, 살아서 계속 괴로웠으면 좋겠어? 너답네. 기분은... 글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헌신이고 사명이고 무어고 전부 사라지니까 기분 좋단 것 경계도 잃었지만. 대강 그런 소감이야. 나는 애초에 그 무엇도 될 수 없어. (애초는 아니었나... 하고 고민하는 태도가 유약하다. 견고하지 못해. 종랜 짜증스러운 어투로 마무리되었다. 한참의 간극 둔다. 습관적인 감정 표출조차도 지쳐 스러지는 기분.)
락테아:너는 내가 괴롭길 바랬을지도 모르지만 난 그런 생각 한 적 한 번도 없는데. 아프면 사람이 꼬인댔나. 하긴, 넌 굳이 안 아파도 그런 사고방식이긴 했지. 잘됐네, 그거. 그냥 퇴원하면 이대로 민간인 해. (문득 고개 들어 네 얼굴 바라보다가 다시 기대었다. 그러다가 손 더듬에 네 마른 손 꾹 쥐었다. 지금 이 감정 해명하려면 한참을 돌아가 풀어야하기에 단순한 행동으로 이어냈다.) ...손, 잡아 줘.
벨트란 테트라:이타적인 빌런 나셨네. 퇴원은 무슨 퇴원. 솔직히 이제 가능할 거란 생각도 멍청한 거잖아. 피차 알면서도 남아 있는 너는 더 무지한 거고. 미치더니 좋은 머리까지 가져다 버린 모양이네. (침대 위 앉은 채로 고개는 벽에 기대었다. 들어가지도 않는 힘으로 네 손 훑다 서툴게 깍지 끼고 들어올린다. 손목 살짝 돌리어 네 손등에 건조하게 입 맞춘 것이 전부였다. 온기 한 점 없을지라도 서툴러 잡았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그 행동 무마하려고 굳이...) 티아, 나 이제 그만 자고 싶어. 다 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네 향수에 수면제라도 들어 있나. ...그런데, 지금 잠들고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가만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테트라가 감겨오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당신에게 말을 건넵니다.
락테아:그래, 최근 들어서는 더 미쳐서 이제 이게 무슨 사단인지도 분간이 안 가는 것 같아. (실소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매도하는 거 아냐? 네 행동 바라보다가 괜한 불안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싫어 여느때와 같이 말한다.) ...숙녀의 몸에 함부로 손 대는 버릇은 아파도 여전하고. 물론 이번엔 내가 먼저 잡긴 했지만. 닥쳐, 졸리면 자. 자는데, 시간 맞춰 깨울거야. 네가 안 일어나면 때려서라도 깨울거니까 그렇게 알아.
피로한 음성으로 당신과의 대화를 이어나가던 테트라는 곧, 낮은 한숨을 내쉽니다.
이 이상은 힘겨운지 나지막한 힘으로 잡고 있던 손도 떨구어지네요.
한참 있다 다시금 한 번 더 노력합니다.
뼈가 돋아난 마른 손길로 느릿하고, 아주 천천히 당신의 뺨 언저리를 원망스레 쓸어 내립니다.
락테아:...네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았어? 너, 네가...(벌떡 일어나 네 낯 내려다본다. 왜 네가 울고 있어. 잠긴 목소리가 목구멍을 기어코 비집고 나왔다.) ...어떻게 된건데?
벨트란 테트라:닥쳐, 빌어먹을! 네가 나를 죽였어. 몇 번이고. (어조가 강해지다 기침 두어번 뱉고 손 세게 쥐었다. 손톱이 누른 부분은 희게 질렸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나더라. 꿈인 줄 알았어. 내 끔찍한 흉을 자꾸 들춰보는 게 결정적이었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물론 네게는 중요하겠지. 너는 죽어 마땅한 이기주의자니까.) 네 애정이 그딴 거야? 아니지, 날 위하는 척 쏟아내는 증오의 방식이 이런 거냐고. (난 마지막까지 세계에 헌신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너 하나는... 정신 없이 뱉어내다 호흡이 부족했는지 무언지 말 뚝 멈춘다.)
락테아:...아냐, 아니야. 나는 단지 널 위해서...(내가 널 죽였다니, 그 반대잖아. 혼란스러운 얼굴로 어쩔 줄 모른다는 듯이 갈 곳 잃은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 입술만 한참 달싹이다 다물었다.) ...네가, 네가 미웠다면 내버려뒀을거야. 네가 그렇게 아파서, 고통 속에서 발버둥치다가 죽도록. 그런데 그러지 않았잖아. 나도 같이 그만큼을 나눠 가지며 널 살리려고, 내가 다시...(...) 왜 몰라줘?
벨트란 테트라:나는 그리 생각하기 싫어. 너는 원체 그런 애니까. 제정신 아닌 사고방식 때문에, 내 곁에 남고... 고통받다 죽는 것보다도 더 아픈 기억을 선물했잖아. (말했잖아, 이해하려면 차라리 둘 중 하나는 숨 쉬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네 애정은 내게 짙은 난도질이라.) 난 아직도 생생해. 너와 함께 걸었던 곳들, 혹은 죽을 듯 후회했던 찬연한 과거. 내가 사랑했던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자꾸, 자꾸만 꿈을 꿔. 내가 온전했을 때의 시간들이 나를 괴롭혀.
목소리가 기어코 갈라집니다. 표정은 무너졌고, 히어로 벨트란 테트라, 이제 그는 없습니다. 적어도 세계와 테트라 본인은 그리 받아들이겠죠.
벨트란 테트라:더 이상 제정신 아닌 채로 허튼 짓 하지 마. 티아,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고, 세계를 위해 그 무엇도 할 수 없어. 존재하는 것조차 버거워서…
이제 놓아줘. 증오한다면, 위한다면... 이제 말과 숨조차 지쳤다고 했잖아.
락테아:시, 싫어. 네가 날더러 살아가랬잖아.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이도저도 되지 못한 채로 살라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하는거야. 너도 이도저도 되지 못한 채로 살아. 내가 널 위한다고 하는 게 모순이고 네게 고통이면 반대로 말해줄게. 날 위해서 살아. 그런 관계 아니었어? (어그러진 옛 것 휘저어본다.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임에도 애써 이어간다. 얼기설기 들러붙은 감정들이 제멋대로 조잡하게 열을 이루었다.) ...생생하다면, 찬연하다면, 사랑했다면! 그럼 살아주면 안 돼? 나, 나한텐 네가 필요해. 난 네가 죽는 게 싫어. 그래, 인정할게, 나 이기적이야. 그러니까 네가 살면 좋겠어, 날 위해서. 이유가 중요해? 살아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 아냐?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분간조차 가지 않는다. 소매로 눈가 거칠게 닦아 터져나오는 눈물을 애써 지워낸다. 목 메인 소리가 비져나온다.) 알아, 알아주면 안 돼? 왜 매번 너는 몰라줘?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네 삶에 가장 집착하는 건 나란 말이야...
너는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 날 없앨수도 있겠지. 그런데 난, 어느 쪽도 안 돼, 란....
벨트란 테트라:너와 나 사이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성립되지 못하는 모양이야. 옛적부터 그랬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못해서는 결국 서로를 갉아먹는 관계라고. 내가 이타적이라고 생각하는 너도 참 꾸준해, 락테아. 쓰레기의 사고 방식은 죄 거기서 거기인 줄 알았는데 이런 고문은 또 처음이네. 축하해. (수없이 많은 이기심의 증명을 했으나 너는 하나같이 무시했잖아. 이번에야말로 정확하게 짚어줄게. 그 역겨운 이타심이라는 것 내게는 천성부터 맞지 않는데. 격통이 온갖 곳에 스민 몸 일으켜 가까이 숙인다. 한 팔로 네 허리 끌어안고 입꼬리 비튼다. 붉어진 눈가에 창백하도록 푸른 핏줄에 그다지 설득력 있는 협박 방식은 아니었다.)
벨트란 테트라:어째서, 왜. 왜 다시 돌렸어. 이럴 것까지는 없잖아. 너, 이딴 선택을 할 만큼 무지하진 않잖아.
원망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드높아집니다.
락테아:...어떻게 알아, 네가? 이게 다 뭐야? 어째서, 라는 질문은 내가 너한테 해야지. (...) 무지하지 않으니까 이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해주면 안 돼?
벨트란 테트라:절대로. 난 지독한 이기심으로... 네게 관련한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거야. 실컷 원망이나 하고 비루한 감정만 토해내다 시간을 보낼 거라고. (숨을 진정시키고,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꼴로 묻는다. 묻는다기보단 애원에 가깝다. 과거 내보여왔던 빈정거림이나 추레한 말은 없이.) 어떻게 하면 놓아줄래? 수십 번 나를 죽였으면 되었잖아. 날 위한다고 진창으로 밀어넣는 건 이쯤하면 됐잖아. 티아. (두 손에 얼굴 묻어 시선 흩트린다. 목소리가 이리저리 눌려 온전치 못했다.) 네가 원하는 말은 전부 해줄게. 제발, 마지막으로 날 한 번만 살려줘. 내가 동경하는 이상의 벨트란 테트라라도 살아갈 수 있게 놔줘. 역겨운 흉이 진 육체만 죽어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니까. (그래, 빌었다. 가진 전부를 내려놓고 간원한다. 그저 지치고 아프다는 이유만 대가면서.)
락테아:말해주지 않으면 나도 널 놔주지 못해. (...) 네가 죽는 횟수만큼 나도 죽었어. 그러니까 이 정도 대답을 요구할 권리는 나에게도 있어. 그리고 말했다시피 네가 아니라...(입술 꾹 깨물었다. 되지 않는 핑계를 대며 남의 목숨 연명시키는 것은 쉽지 않구나.) ...나를 위해서, 살아가달라고. 당치도 않은 얘기지만. 빌런과 히어로가 아니라, 친구...였던 사이로 나 역시 애원할게. (너와 눈높이 맞추려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자세 고쳐앉을 생각 없이 텅 빈 눈으로 바라만본다. 어디서부터 엉킨 것인지, 그 매듭 풀 수는 있는 것인지. 한참을 간원하는 널 응시했다. ) 그럼 내가 너한테 어떤 형식으로 애정을 베풀어야 해? 우리 사이에 일반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멀쩡한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게 가능했던가?
아, 아니지...애시당초 네가 널 향한 내 감정을 읽어낼 수는 있어? 어디부터 어디까지? 내가 널 죽인 게 아니라, 네가 날 죽였어...
네가 빌어먹게 아프지만 않았어도 이런 괴팍한 방식으로 애정 표현하진 않았을거야.
벨트란 테트라:빌런 어디 안 가네. 너는 끔찍한 사람이야. 그걸 알아야 해. (자조 한껏 담긴 입매가 웃었다. 가라앉은 눈은 지칠 대로 지쳐서 그 빛을 잃었고 어쩌면 어두운 공간 탓에 잿빛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증오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이가 어디에 있어. 성립이 안 되잖아. 허튼 회상 끌어오지 마. 그걸 받아들이고 하나하나 후회하는 것조차 힘이 드니까. (살려달란 애원을 마지막으로 굽히고 들어가는 듯한 문장은 끝을 맺었다. 느릿하게 네게로 시선 옮긴다. 내려다보는 태가 전부 포기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히어로란 명명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이상적인 시선.) 응, 그러네. 불가능해. 이것도 애정이라면 수용해야 할까. (확연히 애정이다. 아끼는 마음으로, 각자의 욕심에서 기한 방식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폭력적인 애정. 수차례의 살해를 걸쳐야 비로소 증명되는 사랑이라. 기이하고 기괴함이 틀림없었다.) 되돌릴 수 없으니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은 채로, 그냥 같이 있자. 우린 항상 그래왔잖아. 한 숨 한 발자국 내어주는 것조차 못해서 매번 깨지고 부서져 온 것 알잖아. 이번에도 같은 거야. (말 끝내고서 한참의 시간 흐른다.) 나,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어. 네게 내 상흔을 옮기게 하는 것. 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어쩌면 너보다 더한 이기주의자라 혹은 겁쟁이라 그따위 짓은 못 했지. 감내하는 게 체질이거든. 목숨을 스스로 끊으면 이 모든 연쇄를 끝내주겠다고 했어. (격통에 얼굴 확 구겼다가 힘겹게 잇는다. 잠시 뚝 하고 끊긴 말 사이로 야트막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런데 웃긴 게 무언 줄 알아? 네게 이 사실을 말하면··· 그 누구도 살 수 없다고 했어. 네가 먼저 날 죽이는 짓 시작했으니 끝은 내가 맺어야겠다. 또 널 죽일 거야. (나 또한 면치 못하겠지만. 전부 포기한 것이 아니라 마치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듯한 비교적 생기였다. 적어도 애원하며 빌빌 길 때처럼 우울해 보이지는 않았다.) 만족해? 이를테면 함께 파멸한다는 정도겠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낭만적이라고 여겨, 티아. 네가 먼저 물었고, 물러서주지도 않았잖아. (악랄한 책임 전가다. 젠장할, 이제는 진짜 아무도 지킬 수 없게 되었어. 최후로 지키고자 했던 너조차. 정말로 내 사명 신념을 잃은 거야. 일말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네가 망가트렸으니까.)
락테아:...그런 건, 이타적이라서 못했다고 하는 거야, 멍청아...(모든 말 받아들이고도 머리로 이해하기 벅차 막혀오는 숨을 애써 골랐다. 그렇구나. 이 모든 건 너와 내 각자의 애정에서 기했구나. 충돌한 건 감정이 아니라 표현 방식일 뿐이었으니.) ...아냐, 만족해. 그 파멸의 원인이 적어도 세계라던가 헌신 같은 우스꽝스러운 것들이 아니니까, 충분히 낭만적이야. 아주 로맨틱해. 응, 우리한테 걸맞는 결말이라고 생각해. (말미에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야 말았다. 종내 미친 것인지 주저 앉아 실실 웃기만 한다. 두 손으로 제 얼굴 덮고는 가만히 말 잇는다.)
너도 참 머리가 안 돌아간다. 내가 그렇게 미웠으면 망설이지말고 그 상흔을 내게로 옮겼어야지. 네 입장에서나 세계의 입장에서나 제법 좋은 결말일텐데. 히어로랑 빌런의 목숨을 저울질 해봤을 때 가치 있는 건 전자니까. 악인에 대한 징벌인 걸로 했어도 재밌었을텐데. 그럼에도 끝끝내 매듭을 지으려는 네가 우스워. 기만적이야, 아주. (내가 할 말은 아니긴한데. 덮었던 손 내리고 천천히 몸 일으켜 네게로 걸음 내딛는다. 이윽고 네 앞에 지친 채로 섰다. 눈에 담기는 네 상에 가슴이 이유 모르게 저려온다. 다만 그 이유가 순수한 애정이 아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너 못지않게 야윈 손 들어 천천히 네 머리칼 쓸다가 이마끼리 맞대었다. 나직하게 입술을 밀고 나오는 그 언어가 너무나도 쓰라렸다. 나 영영 널 진심으로 미워할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망가트렸어. 다만 그건 널 향한 애정에서 비롯한 내 이기심이란 것만 알아줘. 이 순간에도 꿋꿋이 밀어붙이는 이 감정이 그저 증오만은 아니란 것을 알아줘. 란, 나는...너를 애정해. 증오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야. 아니, 애당초 증오하지는 않았는데. (눈 길게 감았다 뜨니 흰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기억을 회고하고 한 가지 확신하게 된 것이 있다. 나는 적어도 이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았음을.)
...란, 지키지 마. 나는 네게 지킴받을 자격이 없고 너는 세계를 지켜야 할 이유가 없어. 그냥 살아. 그냥, 그렇게...아직 너는 하나의 인간이잖아.
벨트란 테트라:너는 모든 걸 이타심으로 덮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실상은 그게 절대 아닌데도. 봐, 죄 이타심의 이름을 하고 있는 무형의 것들이었다면 넌 진작 행복해졌겠지. 이 죄가 이타심이라면, 아주 무겁고 자기희생적이면서 짙은 결일 텐데. 그만큼 네가 나아져야 하는 거잖아. 하지만 지금 우리 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어디 멀쩡한 사람 하나 없이 엉망진창에 곧 있으면 사이좋게 침전물의 잔해 따위로 남을걸. 아니, 운이 나쁘면 그조차도 찾아볼 수 없겠다. 그렇지. (결론은 되돌아 같다. 너는 선의를, 나는 악의를 주장하는 것. 우리의 끝은 언제나 그곳에서 맺었더라. 중등부도, 고등부도, 졸업하고서 이제는 다 해진 편지지에서까지. 참으로 지긋하고 오래된 연이다 결말을 낼 때가 되었다. 어깨 언저리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정리할 생각조차 없이 말하는 투는 더러 기분이 불유쾌할 때만 그러하듯 얌전하기 짝이 없다 결단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 묘사의 한계가 이쯤이다.) 피차 안 돌아가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게 아니었음 이러고 있지도 않았겠지 티아. 끔찍하도록 멍청한 논제에 아무런 소용도 없는 근거 붙여가며 말 늘일 바에야 욕이라도 지껄이지 그랬어. 장단 맞추어 몇 마디 더 해볼까 그럼... 그것도 욕심이야, 젠장할. 그래! 욕심이라고, 전부. 아무리 말해도 네게는 소용이 없어. 나는 그 점이 가장 싫어. 역해서 죽어버릴 지경이라니까 알아들어? 인간인지라 죄책감 같은 것들 밀어닥쳤고 그때문에 포기한 거야. 얼떨결에 네게 줄 수 있는 고통을 약간 감내하기야 했지만 감정적인 것에 비해선 그 아무것도 아닐 테고 그게 전부야. 그냥, 정말로. 방관했을 뿐이야. 더이상의 사족은 붙이지 말아 악인이든 무어든 중점은 네가 지금 당장 빌런이 아니라 락테아라는 데 있으니까. 곧 죽을 테지만 그 전에 죽어버릴 것 같아서. (가까워진 줄로도 모르고 편협한 말로르 토해내었다 깊이서부터 이끌어내는 말 틈 하나하나 그 사이에는 끈질긴 지긋지긋함이 스미어 있다 정말이지 오래도 견뎌내어 켜켜이 쌓여버린, 부패한 덩어리의 극히 일부.) 잘 됐네. 나는 너를 증오해.
그리고 나를 애정하는 너를 증오할 수 있어서 기뻐. (어쩌면 애초부터 악의로 점철된 증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그 몇 문장 이후로는 속내를 당최 끌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쉬운 말로 거짓이라고 하던가 쇄도하는 이물감은 심장으로부터의 비롯됨이라. 감각의 감정의 그리고 문장에서도 차마 애정을 논할 수 없었다 전 사실은 물론이거니와 추억조차 스미게 둘 수 없다 자질구레한 조각들이 섞여서 손 대는 즉 저를 파고들 것이란 확신이 터무니없이 뿌리내려서. 겁이 많다. 지금 이 시각에는, 차마 이겨낼 수 없는 장애물이 많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몸 상태와는 일절 연관이 없는 불명예적 멸절이다.) 그리 생각해 그럼. 너는 내 수단이고 내 생명의 세계의 것이니 나는 순리를 따르는 것뿐이라고. 감정적 개입은 없이. 애정과 증오와 친우 회상 따위 읊기에는 인내가 턱없이 부족해. 티아, 나는... 있잖아, 사실 네가 무어든 개의치 않았나 봐. 인간성이고 무어고 그저 존재했으면 하니까. 틀에 맞추어 재단하는 건 불능하단 결과를 알아서 이런 말 건네는 걸지도 모르겠다. (말이 혼란하다 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횡설수설 실의 가닥처럼 계속해서, 다시금 늘어놓는 괴이한 문장들이 차라리 네게 닿지 않았으면 한다.) 죽을 거야, 티아. 이제는 살라는 말 하지 마. 서로의 동시 절종 죽음을 지켜보아야 한다고 방금 말했잖아. 내가 네게 진실을 털어놓는 순간 그리될 거라고. 어쩌면 이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죽어버릴 수도 있어. (다행히 그렇진 않네. 하지만 곧일 거야. 야트막한 중얼거림이 습관적 다정을 모방한다 오직 네게만 건네는 모자람이다. 정의나 헌신 혹은 정립, 논리와 용기 따위는 저리 내던진 꼴이 보일 것은 차마 못 된다.) 끝이 고지인데 말이 무슨 의미를 지닐 수나 있을까.
락테아:그야 네가 이타적이니까, 멍청아. 이타적인 걸 이타적이라고 하지 뭐라고 해. 다른 이름을 붙일까? 네 이름으로, 벨트란 테트라라고. 내가 행복해지지 못한 건 내 선택의 결과야. 그러니까 네가 그것에 대해 가타부타 별다른 말 얹을 필요는 없어. 너와 나는 각자의 이유로 그렇고 그런 전개를 펼쳤고, 그런 결말에 다가가는 거니까. (전엔 네가 이렇게 말해주었던 것 같은데, 이젠 내가 말하네. 실소했다. 이마 맞대고 속삭이는 그 목소리 어울리지 않게 퍽 다정했다. 낙엽의 빛깔이 흩어지는 그 사이에 투명한 살구색의 손등이 교차해 비쳤다. 가느다란 그 손가락이 머리칼 훑을 때마다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럼 내가 미운만큼 날 사랑하겠네. 미워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도 없잖아. 우린 그런 관계잖아.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네가 날 미워해. 기쁘다, 결말 끝에 네 입으로 사랑한다고 들을 수 있어서. 이게 우리 사이엔 보통의 감정이잖아. (이지러지는 표정 가까스로 붙잡아 입꼬리 애써 끌어올렸다. 울지 않으려고 입술 깨물며 바로 네 낯 마주했다.) 죽지 마. 아직 종지부 찍을 때가 아니야. 아직 내가 네 목에 창 겨누지 않았잖아. ...겨눌 일 없을 거고, 넌 죽을 일 없어. 그리고...설명해줄까. (맞대었던 이마 떼어 한참을 네 얼굴 바라보았다. 수백번 보았던 그 얼굴 사이에 열여덞 그리고 열다섯 적의 인상이 겹친다. 변하기도 많이 변했구나. 구겨지면서도 애써 웃던 낯의 뺨 위로 미지근한 것이 흘렀다.)
알아서 생각해. 무어라 생각하든 좋아. 그런데, 이것만 알아둬. 나에게는 널 진심으로 증오할 이유가 없어. 겉으로는 그래 보일지 몰라. 그런데 그 증오 얼마나 두껍겠어. 막상 파헤쳐보면 네가 기겁할만한 것들이 더 많을걸. 말해줄게, 몇 번이고. 널 애정한다고. 네가 나를 증오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그리고 너는 여전히 나에게 다정해. 그게 죽고 싶을 정도로 싫겠지, 너는? (천천히 손 들어서 네 머리 쓸어내렸고 이내 거두었다. 무슨 결말이든 수용할게, 그럼.)
전했으니까 이제 상관 없어. 진실을 알았으니까 됐어. 너한테 미움 받아도 상관 없다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듣고보니 마냥 그건 아닌가 봐.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네, 이거.